그 남자와 그 여자의 미국 세포가 다 사라져 버리기 전에 남겨둡니다
여보, 다음 주가 설인가?
한국에 돌아와 맞는 세 번째 설날이지만 여전히 설 명절 느낌은 없습니다. 몇 달 전 넷플릭스에서 재미있게 봤던 <Holidate>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시즌의 나라 미국은 연중 축제 느낌이 가득했는데 한국에서의 지난 2년은 참 조용했습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한 한국 생활이 어느덧 적응이 다 된 것 같습니다. 2020년 말에 한국에 들어와 크리스마스를 벌써 세 번을 지냈어요. 미국 생각이 많이 나던 2021년에는 그래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미국 얘기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문득문득 미국 생각이 날 때면 아내와 둘이서 잠깐씩 얘기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랍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 생일 즈음에 한 번씩 사진을 몰아서 보곤 했고요. 출퇴근 길에 자주 듣던 Lester Holt의 Nightly News도 이제는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설 명절을 앞두고 유독 미국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지난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차분히 돌아보며 아쉬워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이사 준비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 너무나 아쉬워, 미국 세포가 다 사라지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라도 남겨두려 합니다.
이제부터 써 내려가는 지난 10년 간의 미국 이야기는 제 관점에서 쓰는 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시간을 함께 한 그 여자의 이야기에는 또 다른 감동과 웃음이 있습니다. 아직 제 얘기도 풀어놓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이야기도 나중에 들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사실, 요즘 아내에게 브런치에 글을 써보라고 계속 설득 중이랍니다. 잠깐 곁다리 얘기를 좀 하자면, 저는 아내가 용기를 준 덕분에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브런치 작가 되기
작년에 학교에서 짧은 강연 영상을 하나 찍었는데 처음 촬영해 보는 거라 안전하게 대본을 읽으면서 했어요. 편집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말하는 것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웠죠.
어 교수네, 어 교수. ‘어’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아내의 피드백은 늘 진심이라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출근하기 직전,
그래도 대본은 잘 썼어. 내용이 좋더라.
이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 그날 바로 대본을 브런치 글로 옮기고 브런치 작가되기 신청서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승인 되었다는 기분 좋은 메일을 받게 되었어요.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어쨌든 사랑에 눈이 멀어 저를 따라온 아내도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사리가 제법 만들어졌을 겁니다. 제가 서울 토박이인 아내를 미국 시골로만 데리고 다녔거든요. 일단 마음 엑스레이로 보니 사리가 몇 개 보이네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어쩌다 보니 청운의 꿈을 품고 간 미국에서도 시골에서 공부하고 또 시골에서 직장 생활까지 하는 묘한 상황이 계속되더군요. 그러다 덜컥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한 번쯤 뉴요커의 삶을 꿈꿨는데 말이죠. 치열했고, 뜨거웠고, 지루했고, 외로웠지만 따뜻했고, 무서웠지만 설렜고, 부족했지만 여유로웠고 감사했던 미국에서의 그 모든 순간순간이 긴 꿈을 꾼 것처럼 희미해져 흩어져버리지 않게 글자 사이사이에 잘 담아두려 합니다.
서른 즈음의 남녀가 만나 마흔 즈음까지 가정을 꾸려간 그 축복의 시간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