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빚마(중요한 건 빚진 자의 마음)
지난주 교보문고 본점에 들러 책을 몇 권 샀다.
그중 가장 두껍고 무거운 책이 있었으니, 바로 가천대학교 이길여 총장님의 회고록 <길을 묻다>였다. 총장님의 인생 경험과 업적만큼이나 두꺼웠다.
매대에 진열된 책을 보고 다른 분도 아니고 존경하는 총장님의 인생철학이 담긴 책인지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어머 이건 사야 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길여 총장님의 무수한 일화들에 대해 들어왔지만, 책을 읽어보니 몰랐던 내용들이 많았다.
여러 이야기들 중 미국에서 의사로 정착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그 마음에 다시 한번 숙연함과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던 2020년 대한민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있었음에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놓고 고민했었다. 하물며 총장님께서 귀국하시던 1960년대 후반이면 미국과 한국의 생활 수준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고민의 크기도 더 크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길여 총장님께서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빚진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총장님의 남자 학우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해 대부분 전사했다고 한다. 그때 그렇게 나라를 지킨 친구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의사가 되었고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일평생 살아오셨다고 한다.
내 경우를 생각해 봤다.
나는 왜 영주권까지 받은 미국에서 안정적 직장을 놔두고 굳이 한국으로 왔을까?
총장님과 같은 박애, 애국, 봉사와 같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그런 큰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선택에 대한 이유는 늘 선택 이후에 만들어지거나 발견되는 법이지만, 2020년 당시에는 확실히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나에게 있어서 미국보다는 한국이 오히려 더 큰 기회의 땅이라 생각했다.
역동적이고 매일매일 활력이 넘치는 그런 재미있는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길여 총장님의 인생 철학과 카리스마를 고스란히 녹여낸 가천대학교의 역동과 도전 정신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와 딱 맞아떨어졌다고나 할까.
특히나 갓 신설된 따끈따끈한 심리학과라니, 모든 것이 최초가 되고 역사가 되는 정말 멋진 업무 환경이라 생각했다. 아직도 최종 면접 때 들었던 "창업주라 생각하고 학과를 잘 꾸려나가주시기 바란다"는 덕담을 잊을 수가 없다.
둘째, 아내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여러 가지 적응의 문제로 도전의 연속이었던 긴 시간을 버텨주고, 그 속에서 행복한 가정이라는 선물을 준 아내에게 이 정도면 하산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물론 미국 시골에서의 생활은 아내의 선택이었고 당연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희생이 희생이 아닌 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물갈이에, 산후우울증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교통사고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남편의 직장 계약 만료 위기에, 아이 둘 육아에,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적응할 때가 되니 비로소 하산하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셋째, 총장님과 같은 빚진 자의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면 늘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우리는 다 사랑의 빚진 자들이야. 엄마도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베푸는 거니까, 너도 늘 사랑의 빚을 진 마음으로 살아야 돼."
그랬다.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한 마음이었다. 타지에 오랫동안 있다 보니 부모님 살아계시는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막상 와서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어려울 때도 있지만, 초심을 되새기며 부모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형제자매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도 다시 이어지는 그 모든 것이 감사하다.
한국에서의 바쁜 생활에 치여 잠시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오랜 가르침, 빚진 자의 마음을 상기시켜 주신 이길여 총장님께 감사드린다. 덕분에 한국에 오게 된 이유들에 대해 정리할 시간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나도 거저 받은 이 사랑의 빚을 되갚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살아내겠다고 다짐해 본다.
현재 나의 깜냥으로는 이길여 총장님처럼 나라를 위한 고민까지는 못 하더라도, 몇 명이 됐든 내 주변과 내 일상의 영역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