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나는 수염을 잘 깎지 않는다. 그냥 하루 이틀 미루는 정도가 아니라 길게는 한 달 넘게도 그냥 둔다. 그렇게 두면 무슨 만주족 도적마냥 수염이 자라는데 딱히 다듬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습관으로, 고등학교에 두발규정은 있어도 수염규정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선생님도 좀 깎으라고 얘기만 할 뿐 강제로 어떻게 처리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 참고로 나는 귀찮아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니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책잡힐 껀덕지가 없었다. 모든 규칙을 잘 지키지만 수염만 기른 학생을 어느 선생이 뭐라 하겠는가?
이는 대학교와 군대로도 이어지는데, 대학교는 애초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고 군대에서는 30명 정원의 작은 배를 탔기 때문에 몇 주간 바다에 나가면 그동안 수염을 길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르는 부사관과 수염론에 대해 떠들었을 정도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가서도 딱히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개발자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뿐 영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면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나도 바보는 아니다. 회사 업무로 다른 회사 사람을 만나거나 개인적으로는 연애를 할 때 면도를 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때도 면도를 했다. 나는 면도가 필요한 경우와 아닌 경우를 구분할 줄 알고 보통은 상대방에 대해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는 경우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이 직접 말은 못 하지만 이런 나의 수염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다. 회사 임원 중 한 명이 빙 돌려서 티를 냈던 적이 있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웃어넘겼다. 누군가 보기 거북하다고 내가 면도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여자 직원에게 보기 안 좋으니 화장을 좀 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게 왜 잘못됐는지 설명이 필요한가?
다시 말하지만 나는 어떤 때라도 면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단지 실질적으로 아무런 필요도 효과도 없으면서 "OO라면 면도를 해야지!" 같은 사회적 통념에 의해 면도를 하지 않는 것뿐. 면도를 해서 개발실력이 올라가고 업무능률이 오른다면 당연히 면도를 해야겠지만 면도는 마법이 아니다. 누군가 면도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면 나는 주변에 "귀찮아서 면도를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데, 이 '귀찮음' 에는 그냥 면도라는 행위가 귀찮은 것 이외에도 사회적 통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들어있다.
남자니까, 회사원이니까, 30대니까,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해야지! 같은 것들이 나는 너무나도 귀찮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들을 보통은 거부한다.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고 연애나 결혼도 신경 쓰지 않고 나이에 걸맞은 행동거지나 친분에 의해 강요되는 행사참석도 잘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모두도 나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당신의 옷차림이나 연애/결혼 여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업은 있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당연히
당신이 면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전혀 상관없다!
자 결론이다. 나는 "자유가 최고야! 사회에 순응하는 멍청이들!" 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혹시나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멋있게 보이는 것을 좋아해서 면도를 하고 옷을 잘 입고 바른 행동거지를 한다고 해도 나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인정을 위해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려 하는 것도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배척할 배짱도 논리도 없고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귀찮게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나는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사회적 압박이 의무로 작용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것이 좋으니 이렇게 살아갈 것이고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이 좋으니 다르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을 남이 뭐라 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회는 서당이 아니고 당신도 훈장이 아니다.
나도 면도를 하긴 하는데 대부분의 이유는 이것이다.
수염이 너무 길었을 때. 수염이 많이 길어지면 도리어 불편하고 면도가 점점 어려워진다.
피부에 뾰루지가 났을 때
엄마가 내 수염을 볼 때마다 짜증을 내기 시작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