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만난 돼지간&바지락 볶음면
상하이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더니 잠자리가 썩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설친 건 아니지만.)
동행이 있었다면 일반 숙소를 예약했겠지만, 나 홀로 여행이다 보니 합리적인 가격대의 싱글룸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더라도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인 아니었던 게, 숙소 위치가 상하이의 주요 지하철 노선(1, 2호선)들이 지나가는 인민광장(人民广场) 역 근처라 이동이 편하다는 장점은 확실했다. 인민광장은 난징동루(南京东路) 보행가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서울로 치자면 명동 같은 곳이다. 이 번화가는 상하이의 가장 유명한 여행지인 와이탄(外滩)까지 이어진다.
전날에 양꼬치를 먹느라 새벽 2시 넘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났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었다. 원래는 일찍 일어나서 중국식 만둣국인 훈뚠(馄炖)을 아침으로 먹을 계획이었지만, 일어나 보니 아침은커녕 이미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결국 훈뚠은 포기하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 오픈런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이전에 중국 친구가 소개해 준 국숫집이 있었다. 친구 말로는 상하이 최고의 국숫집이라는 데, 과연 맛집 어플에서도 평점이 매우 높았다. (놀랍게도 구글 지도에서는 리뷰가 4개 밖에 없다. ) 친구는 국숫집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 맛집이 많다며 꼭 가보라고 했다. 어차피 오후에 가려고 했던 장소도 같은 방향이었던지라 추천 요리도 먹어볼 겸 둘러보기로 한다.
그런데 식당에 도착했더니 이미 12시가 지나 점심식사 시간대에 걸려버렸다. 꾸물거리지도 않고 씻자마자 바로 숙소를 나왔는데도 (게하는 씻는 것도 불편하여 꾸물럭거릴 건덕지도 없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고 도착한 뒤에도 또 한참을 걸었더니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가게는 건물 사이의 골목 안쪽에 잘 안 보이게 숨겨져 있었는데, 줄 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빼어져 나와 있어 눈에 띄었다.
줄 서 있는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친구는 최근에 더 유명해진 거 같다며, 기다려야 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국숫집은 회전이 빠를 거라고 기다려서라도 꼭 먹어보란다. 확실히 10분 정도 기다렸더니 대부분의 줄이 빠졌다.
주문 카운터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쳤음을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카운터에서 메뉴판 없이 중국말로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림하나 없이 한자만 빼곡히 적힌 메뉴판이 벽에 붙어 있었고, 중국 사람들은 이걸 보며 주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중국어로 기본적인 회화는 할 수 있지만, 음식 이름은 전문 중국어의 영역이다.
중국어는 한자마다 고유의 발음이 있기 때문에, 발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뜻을 알아도 읽지를 못한다. (표의문자의 특징) 그래서 허겁지겁 맛집 어플을 켜서 이 식당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를 서치 한 다음에 해당 메뉴의 한자 발음을 숙지했다. 메인 메뉴까지는 얼추 찾았지만 국수 위에 올릴 토핑은 제대로 찾지 못한 채로 나의 차례가 왔다. 두뇌 풀가동. 머리 한쪽에서는 한국어와 중국어 간의 번역기가, 다른 한쪽에서는 가격과 환율을 더하고 곱하는 계산기가 팽팽 돌아가면서 겨우 주문을 마쳤다.
그런데 난관이 끝난 게 아니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니 카운터에선 종이 쪼가리에 숫자를 적어 주었다. 서버들이 열심히 숫자를 외쳐대는 걸 보니 음식이 나오면 숫자를 호명하는 듯했다. 말하기 시험이 끝나자마자 듣기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숫자 하나 알아듣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주문을 놓치면 더 어려운 중국어를 해야 한다는 사소한 불안감이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찝찝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걱정이 기우에서 그치듯 음식은 문제없이 잘 받았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돼지 간과 바지락을 간장 베이스의 소스에 짭조름하게 볶은 면이었다.( 蛤蜊煮干面). 모두 아는 재료이지만 이런 조합의 음식은 처음이었다. 비주얼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질적인 두 재료를 하나의 그릇에 담을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먹어보니 맛도 훌륭했다. 인상 깊었던 건 돼지 간의 식감이 그동안 먹어왔던 것과는 달랐다는 점이다. 보통 돼지 간하면 퍽퍽한 식감을 떠올리지만, 국수에 들어간 돼지 간은 생각보다 퍽퍽하진 않았다. 사실 조금은 퍽퍽했지만 순대의 간과는 달랐다. 순대를 먹을 때 간을 잘 안먹는 편인데, 적어도 여기선 불호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돼지간이 원래 이 정도까지 부드러울 수 있는 얘였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중국 면발 특유의 찰기까지 힘을 보태니 정말 맛있었다. 왜 친구가 상하이 최고의 국숫집이라고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고 난 뒤에 추천해준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나 이거 한국 가져가서 장사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