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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영 Aug 09. 2024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 다름에 대한 이해...

그저 똑같은 일상이 바쁘게 지나갔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그런 하루하루가 싫지 않았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커가기도 하고, 나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하고, 말썽도 부리며 하루라는 동그라미가 잘 굴러갔다. 동그라미가 한바퀴 돌면 나와 아이들은 달빛 조각이 들어오는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지디가 병원에서 손님맞이 업무를 보다 업무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담요를 모아놓는 케이지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세상 귀엽다.


행복의 기준은 각자 다 다르다. 또 삶의 시기별로 다를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어릴적에는 성적이 행복의 기준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성공이 행복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결국 경쟁에서 이겨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본질적인 기준은 동일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누군가와 경쟁 중이였고, 나는 되도록 빨리, 되도록 큰 폭으로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경쟁은 끝이 없는 경기였고 나는 어느 순간 지쳐갔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취직을 해도 경기는 계속 새로 시작되었다.   

   

이 무더운 날씨에도 과수원으로의 산책은 멈추지 않는다. 이른 아침이긴 하지만 아이들은 더위를 잊은채 신나게 산책을 즐긴다.


내가 그렇다고 그 경쟁이라는 게임을 멈추려고 시골에 온 것은 아니였다. 나는 철저히 경쟁구도의 사람이었고 내 행복의 기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잠시 휴가를 갖기위해 시골에 오게되고 이곳에서 나의 아이들을 만나 눌러앉게 되면서 지금의 나의 삶과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그렇기에 나는 단언컨데 동물이 주는 깨달음은 그 어떤 스승보다 책보다 더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하며 나는 점점 그들을 닮아갔다.  

   

우리 집에 장난감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가 들어왔다. 장난감을 선물해주자 얼마나 장난감이 좋은지 잘때도 누가 가져갈까봐 베고 누워서 잔다.


엄마의 밥상, 내가 좋아하는 음악, 강아지들의 숨소리,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내방, 요즘 내 삶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다. 이것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 물론 나는 운이 좋게 인가가 없는 넓은 터전을 지니고 있고, 동물병원도 운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다. 이런 것들이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자리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나를 웃음짓게 해주는 것은 위의 4가지면 충분하다. 

    

제일 앞에 있는 아이는 '웃짜'라는 아이다. 오랜 학대로 상처 구멍마다 구더기가 나오는 채로 병원으로 왔다. 치료는 다 되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로 공격적이어서 웃으며 살라는 뜻이다


오래된 친구들이 내가 사는 곳으로 와주었다.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친구들의 걱정을 듣게 되었다. 아직 젊은데 남자도 없이, 여행도 못가고, 서울도 못오고, 친구도 없이 지내는 것이 많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걱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의 걱정은 어떻게 하면 보호소가 안락해질까, 자꾸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병원으로 오게 되는데 그 아이들을 내가 어떡해야 할까, 내 아이들은 지금 행복할까, 아이들의 눈을 보면 이런 걱정들이 나의 개인적인 걱정을 압도한다. 관점이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 생각의 그릇이 커진다던데... 나의 경우가 이에 속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동물을 향한 걱정때문에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다. 내가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이 나를 두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예전에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버려진 아이들과 함께해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덥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보호소에 파보가 역병처럼 돌았고 몇 안되는 아이들은 병원으로 보내졌다. 많은 아이들 중에 2마리만 살아남았다. 그중 '우렁이'라는 아이다.


사람은 얼굴 표정으로 많은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와 동시에 표정으로 많은 거짓을 꾸며내기도 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표정은 그들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난 말이 안 통하는 동물이 말이 통하는 사람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소통하기 편한지도 모르겠다. 동물의 표정에 몸짓, 발걸음까지 더해지면 난 정말 다 알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파보에서 살아남은 '고동이'라는 아이이다. 파보때문에 다시 보호소로 보낼 수도 없어 결국 내가 입원하기로 하였다. 요즘 나의 엔돌핀들이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에 아이들과 뒤엉켜 그들의 새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난 이곳에서 드디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또 꿈꾸고 고뇌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나에 대한 걱정은 그만 거두어주었으면 한다. 나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다른 길을 열심히 걸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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