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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24. 2022

묵직한 질문을 경쾌하게 던지는 소설

김영하의 『작별인사』리뷰

어렸을  잡지에서 읽은 SF단편  잊히지 않는  자신이 외계인임을 모르고 있던 주인공이 마지막에 스스로를 의심하는 발언을 하자 폭파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외계인......?'이라고 하는 멘트가 외계인들이 지구를 폭파시키기 위해 보낸 로봇 폭탄의 암호였던 것이다. 너무나 기발했던  작품이 필립 K. 딕의 「사기꾼 로봇(Imposter)」이었다는 것을 알게  것은     아리랑도서관에서였다.   이야기를 하냐 하면 김영하의 신작 장편 『작별인사』의 주인공 철이가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한 '미등록 휴머노이드'였기 때문이다.

9년 만에 김영하가 내는 장편소설이라는 이 작품은 SF소설이다. 필립 K. 딕이나 아이작 아시모프, 레이 브래드버리 같은 정통 SF작가뿐 아니라 요즘은 가즈오 이시구로 같은 노벨문학상 소설가도 이 형식을 차용할 정도로 SF는 인간을 탐구하기에 꽤 적합한 장르다. 이 소설 역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 최진수 박사가 인간처럼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은 물론 꿈까지 꾸는 최상급 휴머노이드 철이를 '회사 몰래' 개발해 평화롭게 함께 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철이가 수용소로 끌려가 혼돈의 세계에 던져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작가는 왜 소설에 휴머노이드를 등장시켰을까. 힌트는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허수아비의 대사 "사람으로 사는 건 참 불편하구나."에 있을지도 모른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과연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계속 발전하면 결국 기계가 인간을 넘어서는 날이 오지 않을까. 김영하는 이런 질문을 토대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소설엔 휴머노이드 철이 말고도 애완용 고양이인 데카르트가 나오고(스필버그의 《A.I》에 등장하던 슈퍼 토이 테리가 생각난다) 재생 휴머노이드인 달마, 그리고 불행한 이유로 탄생한 클론 선이까지 다양한 피조물들이 등장한다. 인간 수명의 한계를 얘기하기 위해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거론되고 민이의 의식과 기억을 클라우드에 올리는 이야기는 켄 리우의 '싱귤레리티 3부작'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일이다. 김영하가 이런 레퍼런스들을 성실하게 찾지 않았다면 『작별인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앙상한 작품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만 나는 철이와 선이가 달마를 만나서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탄생과 죽음을 얘기하는 중간 이후가 너무 관념적이라 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이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수용소와 폐기장이 어느 순간부터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이명준이 고민하던 배 안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소설을 읽은 다음날 <서촌그책방>의 하영남 대표님을 만난 김에 그 얘기를 했더니 하 대표님은 김영하처럼 인기 있는 소설가가 가벼움에 투항하지 않고 아직도 이렇게 묵직한 질문을 던져줘서 다행이라고 했다. 늘 그렇듯 서가에 있는 책에 '자잘한 디테일이 아니라 인간의 멸종이나 AI의 한계 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김영하 작가가 있어서 너무 든든하다'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달아놨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하 대표님의 의견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정말 잘 쓰는 작가다. 철이가 선이 때문에 약간이나마 운명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다거나 휴머노이드인 민이의 죽음에 공통적으로 슬픔을 느끼는 장면 등은 작가의 내공이 깊지 않으면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기 힘든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철이 같은 휴머노이드를 만들었냐는 변호가의 질문에 '철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류와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상징적 존재'라고 대답하는 최진수 박사의 대사가 너무나 훌륭했고, 이를 통해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만큼 모든 게 절실했던 건 아닌가' 하는 니체적 깨달음도 좋았다. 네트워크에 처음 접속하는 철이를 남극의 펭귄으로(얼음 위에서는 뒤뚱거리다가 물속에 들어가면 날렵해지는) 비유한 것도 노련한 아이디어였다.


교보문고에 갔다가 점령군처럼 쌓여 있던 '작별인사' 책더미에 거부감이 느껴져 안 샀던 나는 다음날 대학로 동양서림에 가서 결국 이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베스트셀러라는 유행에 편승한다는 거부감보다는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가 더 컸기 때문이었고 그 믿음은 이번에도 유효하다.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우리 곁에 김영하 같은 소설가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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