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처럼 마음을 적시는 박해영의 대사들
편의점 본사 영업사원인 창희는 관리하던 편의점 점주로부터 아주 매력적인 제안을 받지만 약삭빠른 회사 선배 정아름에게 그 기회를 빼앗기고 만다. 명백한 협잡인데도 절대 아니라고 발뺌을 하는 정아름을 보며 창희와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한숨을 내쉴 뿐이다. 잔뜩 나빠진 기분으로 은행에 가 ATM기 앞에 서서 줄을 선 창희는 기다리는 동안 전화로 친구에게 하소연을 한다. 이야기는 '왜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은 다들 이렇게 불행한가'라는 이전의 농담 또는 한탄의 연장선이다.
"내가 이제부터 정 선배를 사랑한다. 그래서 꼭 쪽박 차게 만든다......"
이런 하릴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앞에 선 사람이 통장 여러 개를 기계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시간을 끈다. 느릿느릿. 속이 터지는데. 야, 인간적으로 그러면 한 번만 뽑아야 할 텐데.
"돈 뽑으러 갔는데. 느려 터지는데. 통장 쌓아 놓고 느릿느릿...열통 터져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러다 사고 친다. 엎친 데 덮친다고 꼭 이럴 때 사달 난다. 옛날에 친구 놈이 여친이랑 헤어지고 오늘 죽고 싶다고 술 처먹고 난리 치다가 옆 테이블이랑 싸움 붙어서 경찰서 갔는데, 가서 보니까 옆 테이블의 그놈도 오늘 죽고 싶었대. 꼭 그런다. 끼리끼린 과학이라고, 꼭 비슷한 것들끼리 붙어서 사고 나. 조심하자. 까딱 잘못하다간 오늘 나처럼 누구 하나 패고 싶은 놈이랑 들러붙어 사고 친다...... 이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창희의 어깨를 툭툭 친다. 자기 버스가 금방 올 것 같은데 돈을 좀 먼저 뽑으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창희는 '좌석버슨가보지, 이삼십 분에 한 번씩 오는.'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잖아. 기어이 올 게 오고야 말았구나...... 울화통을 터뜨리려던 창희는 순간 마음을 바꾸어 그 중년 남자에게 자리를 내준다. 씩 웃으며 어서 하시라고 손짓까지 하면서.
"자랑이냐...? 잘했어."
이번 대화 상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던 친구이자 프리섹스 주의자인 현아다. 현아는 얄미러운 정아름 얘기를 듣고 당장 그녀를 불러내라고 한다. "정아름, 한 달은 실어증 걸리게 만들어 준다." 하면서. 창희는 스마트폰을 들어 정아름에게 전화를 걸려는 현아를 뜯어말리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양보해준 사람이 급하게 자리를 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ATM기 화면 속 이야기다. "그분 통장 상태를 봤어. '잔액이 부족하여 5만 원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 양보하길 잘했다, 마음이 풀리더라. 뭐 이런 사람도 사는데, 그런 건 아니고....... 그건 그분께 실례고. 내가 남의 불행으로 위안 삼고 그런 형편없는 놈이긴 한데. 오만 원도 없어 못 뽑았는데 버스까지 놓치면 얼마나 그랬겠냐."
현아가 잘했다고 칭찬을 하자 속없이 신이 난 창희는 자신의 팔자가 가랑비를 닮은 것 같다고 말한다.
"난 좀 그런 팔자 같애. 가랑비 같은 팔자. 그, 왜, 강이나 바다처럼 크게 내 물줄기기 있고 그런 건 아닌데, 가랑비처럼 티 안 나게 여러 사람 촉촉하게 하는. 음. 돈도 뭐 그 정돈 있을 것 같고."
넷플릭스로 《나의 해방일지》6회를 다시 보다가 무릎을 쳤다. 염미정의 '추앙' 발언이나 말 없는 구 씨 손석구의 매력 말고도 이 드라마엔 이런 에피소드와 통찰들이 촘촘히 깔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있을 것 같지만 전혀 뻔하지 않은 이야기들. 누구나 공감하지만 작가가 풀어놓기 전엔 누구도 드라마에 등장하리라 떠올리지 못했던 상황들. 문득 작가의 머릿속을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별 소득이 없을 거란 생각이 바로 들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박해영 작가가 천재라서 그때그때 자동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평소 지루할 정도로 꾸준히 모아 놓은 결과물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쓸데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들도 꾸준히 모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발화를 한다. 잔액이 부족해서 5만 원도 찾을 수 없었던 남자의 이야기도 그렇게 언젠가 작가가 들었거나 겪었던 이야기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회사를 그만둔 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0원'이 찍히는 경험을 여러 번 해보았다. 그땐 미칠 것 같았지만 언젠가는 그 것도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며 웃었다. 박완서 선생은 전쟁 중에 만난 악인을 두고 '언젠가는 내가 너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말리라'라며 분을 삭였다고 한다. 세상에 나쁜 소재는 없다. 작가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걸작이 될 수도 있고 클리셰 범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박해영 작가의 대사들은 창희의 말대로 '가랑비처럼 티 안 나게' 여러 사람 촉촉하게 해준다. 다른 신작 드라마들을 놔두고 《나의 아저씨》에 이어 《나의 해방일지》를 다시 보는 것은 아마도 그의 그런 역량 때문일 것이다. 존경스런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