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ul 22. 2022

연극 무대에서 설산을 보게 될 줄이야!

연극《터칭 더 보이드》

영화였다면 카메라를 들고 직접 눈보라 휘날리는 페루 안데스 산맥의 시울라 그란데로 갔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헬기를   동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연극 무대다. 대학로에 있는 극장으로 가기  최소한의 장비만 가지고 '알파인 스타일' 거대한 설산에 오르는  조와 사이먼이 어떻게 그려질까 너무 궁금했다.


첫 장면은 죽은 조의 '시체 없는 장례식'에 온 누나 새라의 거친 욕설로 시작된다. 도대체 하고 많은 스포츠 중에 왜 눈 덮인 산에 오르며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결국 다 죽는 바보 같은 스포츠를 택했냐는 원망을 악에 받친 쌍욕에 담아내는 것이다.  조와 함께 산에 오르다 줄을 끊고 겨우 살아 돌아온 사이먼은 면목이 없다. 새라에게 등반의 의의나 환희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 환희에 찬 사람이나 물에 빠진 사람이나 모두 두 손을 들고 있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 보지만 흥분한 새라에게 그건 한가한 선문답일 뿐이다.

사이먼은 새라에게 직접 등산 장비를 착용시키고 상상력으로 설산에 오르게 한다. 여기서부터가 이 연극의 묘미다. 객석 앞 몇 미터에 설치된 비스듬한 무대는 실감 나는 음향과 상상력만으로 금방 설산이 된다. 사이먼은 도시의 소음과 TV 화면이 아닌 거대한 자연의 '공허(void)'를 '터치'하는 등산의 쾌감을 새라에게 전이한다. 그런 이심전심으로 좁은 무대는 설산이 되고 새라는 다리가 부러진 채 얼음 구덩이에 빠진 조를 만나 욕하고, 설득하고, 음악을 틀어주고 노래를 부르고 결국은 잡아끌고 북돋아서 그가 베이스캠프까지 가게 돕는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대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꾸며진 이야기를 믿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연극 무대다. 연극이 끝날 때쯤 자막으로 이 이야기가 실화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관객들이 전율하는 이유는 극장 안이 조금 추웠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아내와 나는 요즘 가장 핫한 김선호가 나오는 회차 대신 이휘종 정환 이진희 조훈 캐스팅을 선택했다. 이휘종은 김신록 배우와 함께 했던 《마우스 피스》에서, 정환은 정경호가 출연했던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실력을 확인한 배우들이다. 작년에 국립극단에 가입해 좋은 연극을 많이 본 것처럼 '연극열전' 역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시리즈는 외국의 탄탄한 각본을 들여오는 미덕이 있다. 아내는 얼마 전 '친구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을 때 별 갈등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어제 '보고 싶은 연극을 보고 싶을 때 보는 삶'을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연극 마니아도 아니고, 언뜻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아내의 그 말엔 나도 동감이다. 연극 값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OTT가 아닌 이상 영화도 못지않게 비싸며 잘 찾아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연극은 늘 있다. 한여름엔 연극을 보자. 《터칭 더 보이드》는 흥행 요소를 많이 갖춘 멋진 연극이다. 9월 18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시어터2에서 상연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스24 인터뷰 : "살짝 웃기는 글을 쓰는 비결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