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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1. 2019

금주 일기 1

6개월 금주 선언 편

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 아내와 는 일정 기간 금주를 해보자는 얘기를 했었다. 아내는 이전보다 몸무게가 늘었고 고혈압약도 먹기 시작한 데다가 나는 건강검진에서 당뇨 수치가 좀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회사를 그만둔 시점에 5월 말이라 이달 말까지만 마시고 6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쭉 술을 끊어보기로 했다(그러니까 12월 31일이 D-day다).


말하자면 어제는 마지막 술자리라 할 수 있었는데 백승권 대표가 이정모 관장 서민 교수가 모이는 술자리에 나를 초대해 준 날이었다. 이른바 '거절할 수 없는' 술자리였던 것이다. 저녁 6시 30분, 약속 장소인 서촌 시장 골목 끝에 있는 '김진목삼'이라는 삼겹살집에서 백승권 대표를 먼저 만났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아서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자리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조성준 변호사가 나타나서 인원이 좀 늘었다고 얘기했고 이어 이정모 관장, 서민 교수가 속속 도착했다. 조성준 변호사와 서민 교수는 친한 동창 사이라 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글을 쓰는 분들이라 나는 서민 교수의 책 <서민 독서>와 이정모 관장의 책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를 가방에서 꺼내 싸인을 받았다. 백승권 대표의 책 <보고서 쓰기>도 대학로 동양서림에 예약을 해놨는데 책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미처 가져오질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화영 선생까지 도착한 술자리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도중에 서민 교수가 어디서 받아왔다며 배낭에서 상추를 잔뜩 꺼내자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상추는 부드러우면서 맛이 좋아서 삼겹살과 목살을 싸 먹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기생충학자이기도 한 서민 교수는 요즘 영화 [기생충]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하며 웃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 글과 인생, 꿈과 이상 등이 어우러지는 대화를 예상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서민 교수와 이정모 관장이 요즘 잘 나가는 저자로서 서로 라이벌 각을 세우며 헐뜯는 자리였다. 나도 그 소용돌이에 합세해 서민 교수 글을 씹으며 얄미운 소리를 몇 번 했더니 '오늘 처음 뵙는데, 다음부터 더 이상 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라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키득키득 웃음이 넘실대는 자리였다. 모두들 장난꾸러기들이라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진짜 싸우는 것 같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1차가 끝나갈 때쯤 혼자 영화 [기생충]을 두 번째로 관람한 아내 윤혜자에게서 연락이 오자 이정모 관장이 "윤혜자 선생 빨리 오시라고 하세요"라고 해서 2차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2차는 이화영 선생 단골이라는 로바다야끼로 가서 시샤모 등을 맛있게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다들 술을 잘 마셨고 술이 취해도 하나같이 달변이었다.  

일산에 사는 분들이 많아 우리들은 2차를 끝으로 헤어지며 8월 모임을 약속했고, 택시를 탄 아내는 취한 와중에도 나에게 삼청동 '기사'에 잠깐 들렀다 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삼청동으로 행선지를 바꿔 달라고 택시기사분께 부탁을 했다. 삼청동수제비 건너편에 있는 슬옹 씨의 가게 '기사'에 들어서니 마침 '금주악단'이 콘서트를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은 예전 '심야오뎅'에서부터 금요일마다 슬옹 씨 가게에서 미니 콘서트를 했는데 우리가 금요일에 여기 온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역시 공연이 있는 날이라서 그런지 손님들이 꽉 차서 앉을자리도 없었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술을 마시고'와 '동백꽃이 피면' 등을 들었다. 아내가 너무 취한 것 같았고 술을 마실 자리도 없어서 노래만 듣고 일어서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는 심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동네로 내려가 굴콩나물국밥을 먹고 아내를 위한 황태콩나물국밥을 사 가지고 올라왔다. 보통 아내는 다음날 오전을 꼬박 보내고 오후 서너 시가 되어야 컨디션을 회복했다. 오늘은 그래도 좀 빨라서 점심때 나와 함께 콩나물국밥을 먹었고 오후 4시경에는 어묵탕을 끓여왔다. 술 없이 안주만 먹는 기분으로 먹어보자고 해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지난번 부산 여행에서 사 가지고 왔던 부산오뎅은 맛이 좋았다.



6개월 간의 금주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다른 아침'을 맞고 싶어서였다. 건강 문제도 그렇지만 가장 조용하고 집중하기 좋은 새벽과 아침을 나름대로 즐기고 싶어서 술을 끊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집은 산 위에 있어서 새벽이면 새소리가 요란하다. 이상하게 차 소리나 사람들이 내는 소리와 달리 새소리는 아무리 커도 거슬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 맑은 정신에 새소리를 들으며 깨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금주가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앞으로 술자리에 나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술자리에서 술 대신 물을 마시면 된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가 술자리에 가서 물을 마시고 취한 척을 하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란다. 수요일에 만나는 친구들이 제일 먼저 나의 금주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부디 노여워하거나 어이없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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