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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13. 2022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많은 영화

안태진의 《올빼미》

(*애교 수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별것 아닌 건 같지만 이야기가 제대로 빌드업되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을 영화 초반에 목격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의 이형익이 '시험용 환자'를 데리고 궁 밖으로 나와 쓸 만한 의료진을 뽑으려다가 되돌아갈 때  마당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경수가 "중풍인 것 같습니다......"라고 입을 떼는 장면이 그랬다. 의원에 들어설 때 발을 질질 끄는 환자의 몸 상태를 눈치챈 건 경수가 맹인 침술사이고 청각이 예민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이는 나중에 중요한 반전을 만든다. 어제 아침에 아리랑시네센터에서 조조로 본 안태진 감독의 《올빼미》는 이처럼 아이디어로 가득한 영화였다. 영화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타살이었음을 암시하는 한 줄 기록에서 출발한 이야기였지만 기발하고 선명한 아이디어들이 영화 곳곳에 매설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고 특히 선의로 가득한 주인공 천경수 때문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뭔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를 보면 감동한다. 앞을 못 보는 데다가 겨우 침이나 놓는 소년 의원이지만 우연히 목격한 살인사건으로 졸지에 정쟁의 한 복판에 서게 되는 천경수(그는 낮엔 소경이지만 불이 없는 곳에선 어렴풋이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고 있다). 시대적 요구와 개인의 욕심이 부딪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양심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병을 낫게 해 주던 침이 살인무기로 변하는 게 한순간이듯 어질고 슬기로웠던 인물이 권력의 하수인이었음이 드러나는 캐릭터의 반전도 영화의 백미다. 소현세자가 경수에게 준 돋보기가 결백의 증거로 쓰인다는 아이디어도 좋았다. 인조 역의 유해진은 물론 경수 역을 맡은 류준열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안태진 감독은 17년 만에 데뷔하는 신인이라지만 《신라의 달밤》 시나리오부터 지금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고 여기에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테크니션들이  힘을 보탰다.  왜 이런 사람들이 모였을까.  일단 원안이 콘텐츠진흥원 스토리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으로 검증을 받은 상태였고 그걸  팩션과 스릴러 형태로 엮어낸 감독의 결기가 믿음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이 영화에 숨어 있는 '시대정신' 때문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정통성도 약하고 병자호란을 치르며 드러난 정치력 부재 때문에 인조의 정신은 피폐한 상태였다. 게다가 청나라에 잡혀 있다가 8년 만에 귀국하는 아들 소현세자는 명을 버리고 청을 선택하자는 개혁파이고 서양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다. 명분에 매달리느라 아직도 명을 숭상하는 아버지 인조와는 다른 인물인 것이다. 가치 판단과 세계관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까. 아직 권력은 인조에게 있는데. 역사상 권력을 위해 친족을 배신하거나 살해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영화 '올빼미'는 이런 정치적 지형을 통해 현 정치권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카메라가 줌-아웃하자 칼을 빼 들고 허망하게 포효하는 인조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던 건 그런 의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위정자가 시대적 요구보다 개인적 욕망에 천착할 때마다 공동체에게는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역설하는 것이다.


영리한 각본, 뛰어난 연기 말고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는 많다. 특히 촛불이 꺼졌을 때 경수의 눈이 점점 밝아지면서 드러나는 어둠과 빛의 디테일은 극장이 아니면 절대로 확인할 수 없는 시네마적 경험이다. 허약한 개인이 역사의 중요한 지점에 개입해 '결정적인 하루'를 만들어 낸다는 스토리텔링의 쾌감도 대단하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재개한 '월조회(월요일 아침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였다. 물론 아직도 회원은 나 하나다.  그래도 상관없다. 다들 출근한 월요일 아침에 스마트폰도 끈 채 극장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1시간 58분 동안 영화에만 집중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호사다. 게다가 동네에 있는 아리랑시네센터는 조조영화 티켓값이  사천 원이다. 맥도날드에 들러서 맥모닝을 먹고 가도 만 원이면 충분하다. OTT 기다리지 말고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시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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