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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05. 2023

잘 만들었지만 아쉬움도 있는 영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더 웨일》

화상 수업으로 집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는 찰리는 272Kg이나 나가는 고도비만 환자다. 학생들이 놀랄까 봐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을 해서 강연자의 모습은 검은 화면으로 일관하지만 예전 '미이라' 시리즈의 미남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가 연기하는 찰리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확신에 찬 내용 덕분에 강의는 나름 인기가 좋다. 하지만 카메라에 비친 그의 모습은 소파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뚱보일 뿐이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지만 고집스럽게 병원엔 가지 않는다. 의료보험도 없고 치료비를 감당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방문 간호사 리즈뿐이다.


찰리는 동성 애인이 생기는 바람에 딸이 여덟 살일 때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왔는데 보이프렌드는 죽고 그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해 고도비만이 되었다. 어느 날 버림받은 딸이 친구를 헐뜯었다가 정학을 당했다며 8년 만에 찾아온다. 찰리가 자신에게 글쓰기 공부를 하고 에세이를 제출하면 남은 재산을 주겠다고 꼬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단 종교 전도사 토마스가 끼어든다.


강하고 흥미로운 설정이다. 첫 장면. 비가 오는 날 우연히 잠기지 않은 문을 두드리게 된 전도사 토마스는 소파에 앉아 뭔가 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찰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냐는 토마스에게 글이 적힌 종이를 내밀며 그걸 읽어 달라고 한다. 노트북에서는 게이 포르노가 상영되고 있다. 찰리가 게이였다는 걸 이렇게 난폭한 장면으로 보여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 등 전작을 생각하면 대런 애로노프스키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폭한 장면을 계속된다. 특히 리즈가 건네준 치킨을 우걱우걱 탐욕스럽게 입에 집어넣는 장면은 압권이다. 누가 먹는 걸 보면서 눈물이 나는 경험은 권여선의 소설 「안녕 주정뱅이」에서 묘사된 편의점 음주 장면 이후 처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테크닉적으로는 매우 뛰어나지만 통찰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레퀴엠'이나 '블랙 스완'에서 보았듯이 대런 감독은 별 사건 없는 이야기로도 몰아치는 연출의 공력이 엄청나다. 이 영화에서도 한정된 공간에 다섯 명 정도만 등장하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두 시간이 흘러간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갸우뚱하게 만들거나 고집스러운 지점이 많다. 일단 게이라는 설정. 가정을 버린 이유가 단순히 바람이 나서가 아니라  동성 애인을 만난 운명적인 사건이었음을 설득하기 위해 성정체성이 활용했다는 혐의를 거둘 수가 없다. 그리고 뭔가 대단한 활약을 벌일 것 같았던 딸 엘리가 성장 또는 확장되지 못한 지점도 아쉽다. 엘리 때문에 결과적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된 토마스가 순진하게 기뻐하는 장면은 좀 어이없을 정도다. 마지막에 찰리가 붕 떠서 해변으로 가는 듯 한 묘사에서는 오래전  알란 파커의 영화 《버디》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산뜻하게 황당했는데 이건 안이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비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리즈 역의 홍 차우는 놀랍다. 한없이 열려 있고 진심이 느껴지는 캐릭터다. 게다가 영화에 세 번 정도 등장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대해 쓴 에세이(그래서 영화 제목이 '더 웨일'이다)는 명문이다. 그럼 뭐냐. 보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나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동네 친구가 꼭 보라고 권하며 표까지 보내줘서 보게 된 기대작이었다. 명동씨네라이브러리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며 아내와 실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울긴 울었는데 도대체 감동 포인트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얘기부터 게이 정체성 활용에 대한 석연치 않음, 피자 배달부의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 표시, 마지막 장면의 안이한 클리셰에 이르기까지. 그렇다고 영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뛰어나지만 뛰어나지 않은 영화'라고 하면 너무 애매한 평일까. 되게 예쁘지만 성격이 안 좋은 여자애를 만나고 온 기분이라고 하면...... 이건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평이 되겠구나. 에잇, 잘 만들었지만 아쉬움도 있는 영화라고 해야겠다.  일 년에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사람에게는 권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두 편 이상 본다면 이 영화를 보시라. 썩어도 준치라고,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그 정도는 된다. 셀럽들을 등장시켜 당의정 입힌 것처럼 만들어 일 년만 지나도 촌스럽게 느껴지는 영화들에 비하면 백 배 낫다는 얘기다. 그 옛날 '미이라' 시리즈의 브랜든 프레이저를 기억하는 분에게는 더욱 권한다. 그는 제 2의 미키 루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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