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r 08. 2023

귀엽고 따뜻하고 짠했던 할머니들의 여행기

연극 《응, 잘가》리뷰

김보나 배우를 좋은 배우로 인식한 것은 정경호, 김세환 배우와 함께 출연했던 화제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였다. 그리고 연말에 안톤 체호프 프로젝트에서 김보나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한 아내와 나는 꼼짝없이 그의 팬이 되었다. 오늘 본 연극 《응, 잘가》는 마침 동네에 있는 여행자극장에서 상연하는 작품이라 더 정다웠다. 웬일인지 아내가 초밥이 먹고 싶다 해서 우리는 '스시산'에서 초밥 세트를 먹고 바로 옆에 있는 극장으로 갔다. 7시 30분에 시작인데 첫날이라 늦게 오는 관객이 계시다며 김현회 연출이 들어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10분 정도 있다가 연극이 시작되었다. 10분을 기다려 주는 넉넉함과 선량함은 연극 안에서도 계속되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할머니 네 명이 안면도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일본 작가 마에다 시로의 작품이니까 원작에서는 아마 다른 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섬이면 어떠랴. 함께 떠난다는 게 중요하지.


동화, 종삼, 안양은 동갑이고 모란은 한참 위 언니인데 모두 젊은 배우들이 노인 역을 맡은 게 신선하고 좋았다.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귀도 안 들리고 말도 잘 못 알아듣는 노인들이라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기 일쑤고 한 얘기 또 하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그렇게 반복되는 이야기가 싫지 않았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어느 정도 졸업한 할머니들은 다들 좀 귀여운 데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와중에도 동화는 성격이 급하고 퉁명스러우며 안양은 중재자 역할을 한다. 연극은 70대 후반에 네 사람이 떠난 안면도 여행과 그보다 18년 전 안양과 딸의 안면도 여행이 번갈아 진행되는데 환갑 기념으로 딸과 둘이 떠난 여행은 결국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김보나, 김초록, 이은, 류혜린 모두 할머니보다 더 할머니 같은 걸음걸이와 표정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노년을 멋지게 연기했다. 얼마 전 다른 연극에서 혼자만 연기를 너무 잘하던 배우라 놀랐던 류혜린은 오늘도 큰언니 모란 역을 눈물 나게 잘해주었다. 마음이 촉촉해져서 극장 계단을 올라온 우리는 극장 문 앞에서 김보나 배우를 기다렸다. 우리 두 사람의 책을 샀다며 연극을 보러 오면 저자 사인을 받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김보나 배우를 만났다. 선량하게 예쁜 얼굴과 목소리 그대로 인사를 하고 내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와 아내의 책 『부부가 둘 다 잘 먹었습니다』를 내밀었다. 나와 아내는 얼른 책에 사인을 했고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았다. 보나 마나 사진이 후지게 나올 거라고 장담했던 아내의 말과 달리 사진도 잘 나와서 더 흐뭇한 저녁이었다. 김보나 배우는 나중에 내게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일단 극장에서 다시 만나자 외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할 서울여대 카피라이팅 강의 준비를 더 하고 자야 하지만 지금 안 쓰면 오늘의 감흥이 사라져 영영 못 쓸 것 같아 '응, 잘가' 리뷰부터 쓴다. 이제 일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잘 만들었지만 아쉬움도 있는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