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아일랜드] 리뷰
군대 가기 전 휴학 기간에 당시 이벤트 회사를 하던 서클 선배 학선이 형이 좀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한동안 '섬'이라는 연극의 포스터를 붙이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무실도 없던 시절이라 신촌에 있던 카페 '그리민'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마음씨 착한 카페 사장 용태 형이 매일 영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그 공간을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덕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엔 공식 게시판 말고는 벽에 포스터를 붙이는 행위는 모조리 불법이었다. 우리는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어느 베테랑 선배의 지도 하에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며 신촌과 종로의 건물 벽에 포스터 붙이는 요령을 배웠다. 순식간에 벽에 풀을 칠한 뒤 포스터를 척 붙이고 도망가는 '풀팅'팀이 있었고 청테이프로 포스터 네 귀퉁이를 척척척 붙이고 도망가는 '테이핑' 팀이 있었는데 나는 테이핑을 선택했다. 그 후에 유행한 '호치키스(스테이플러)로 박고 도망가기'는 아직 등장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다른 극단에서는 팀 막내들이 무급으로 포스터를 붙이러 다녔는데 서로 남이 붙인 포스터를 가리거나 그 위에 덧붙이거나 하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는 비즈니스 윤리가 존재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섬'이라는 제목 밑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정현종 시인의 싯귀절을 무단으로 가져다 쓴 조악한 포스터였다. 보름 정도 포스터를 열심히 붙이고 다녔고 마지막 날엔 공짜로 그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땐 입대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연극이 뜻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좋다 좋다 하면서 봤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연극 안에 들어있는 안티고네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나중에 서점에 가서 그리스 비극에 대해 찾아보기도 했었다.
오늘 본 작품은 '정극을 보고 싶다'며 아내가 페이스북으로 조언을 구했더니 오준석 PD가 추천해 준 [아일랜드]라는 연극이었다. 나는 극장으로 가기 전에 카페에서 모바일로 작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으면서도 막상 그 옛날 내가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던 그 '섬'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연극을 보다가 감방 안에서 '안티고네' 공연 준비 이야기가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30여 년 전 보았던 그 무대가 떠올랐다. 이럴 수가. 어쩐지 공동 극작가 중 하나인 아돌 후가드라는 이름이 낯익더라니. 난 내가 평소 교양이 넘친 나머지 이 작가 이름도 어디서 들어 알고 있는 거겠지 착각했었는데. 제기랄.
연극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고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때도 시기가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내용과 맞아떨어져 어느 정도 울림이 컸다고 한다. 오늘 본 공연은 깔끔한 무대와 연출은 좋았으나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오소독스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가벼운 톤으로 접근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배우들이 베테랑인데 비해 연출이 젊은 여성이라서 의견이 좀 밀린 것 아닐까'라는 개인적인 느낌을 얘기했다. 더구나 유머 코드가 거의 없는 정극인데 극장 안이 너무 더워 중간에 몸이 뒤틀리는 걸 억지로 참으며 봐야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앞뒤에서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극의 흐름과 관계없이 관람을 방해하는 무신경한 극장 관리였다.
그러나 결국 극의 말미 안티고네를 공연하는 장면부터는 역동적인 대사와 액션들이 다시 빛을 발했고 온몸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아프리카 민속춤을 추는 두 배우의 열연엔 모두 감동의 박수를 쳤다. 생각해 보니 나는 30여 년만에 이 연극과 다시 만난 셈이었다. 지난달 부산여행에서도 느꼈던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라지만 이 정도면 정말 억지로 세월을 헤엄치는 내 모습이 애처로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랴. 살아야지. 몇 년 후에 또 인생의 새로운 섬과 만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연극은 하루 백 명의 관객만 받는다고 하는데 매일 매진 행렬이란다. 대학로 선돌소극장에서 6월 15일까지 공연한다.
(마지막 장면에 선보인 배우들의 열띤 아프리카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