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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08. 2019

금주일기 3

가로수길 김봉남 포차 편


나는 술을 마신 다음날이면 이상하게 허리가 아팠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을 많이 마셨으면 남들처럼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쓰려야지 왜 엉뚱하게 허리가 아프단 말이냐.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어느 날 의문이 풀렸다. 너무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 일을 할 때 진득하지 한 곳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책상 앞에서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회의실로 들어가 혼자 끙끙거리며 뭔가를 쓰다가 미친놈처럼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자판을 두드리는 타입이었다. 보통 어떤 자리든 똑같은 자세로 한 시간 이상을 버티지 못하는데 유독 술자리만은 예외였다. 누구와 술을 마시더라도 보통 2차까지는 가는 편이니 술자리가 있는 날은 적어도 서너 시간은 같은 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간헐적으로 술잔과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밥 늦게 집으로 돌아와 누우면 허리가 아플 수밖에.   


6월을 첫 번째 화요일, 생각보다 약간 급해진 무슨 일 덕분에 집에서 뭔가 자료를 찾으며 조급하게 아이데이션을 하고 있는데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문 실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 저녁에 어디서 보면 좋겠냐는 내용이었다. 회사 그만둔 사람들끼리 이번 주에 모여 조촐하게 한 잔 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벌써 그날이 된 것이었다. 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시면 맞춰서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같이 보기로 한 Y실장이 먹은 것도 없이 급체하는 바람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인 현충일에 회의를 하게 되어 약간 마음이 급해진 나는 내심 잘 됐다 싶어 "실은 제가 6개월 간 금주를 하기로 해서 오늘은 나가도 물만 마실 텐데, 그럼 흥이 너무 안 나지 않을까요? 차라리 다음에 보면..." 라고 물었으나 문 실장은 단호했다. 기왕 만나기로 한 날 봐야지 오늘 미루면 우리가 또 언제 만나겠냐는 것이었다. 마침 민재 PD도 오기로 했으니 그냥 보자고 하면서  가로수길에 있는 '김봉남포차' 어떠냐고 물었다. 지도 서비스 검색을 해보니 신사동 서린모텔 골목에 있는 가게였다.


예전 앙드레김의상실이 있던 곳을 지나 '김봉남포장마차'를 찾아가자니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돌아가신 앙 선생의 본명이 김봉남이었으니까. 포차엔 이미 문 실장이 바깥 자리에 앉아 있었고 안주도 시켜놓은 상태였다. 안에 단체 손님이 있어서 바깥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이 집은 '부추꼬꼬'라는 요리가 인기 메뉴인데 잘 삶은 닭고기를 부추에 말아 김치와 함께 소스에 찍어먹는 방식이었다.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처음 온 손님에겐 다 이렇게 한다'며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요리를 조물조물하더니 닭고기 삼종세트 안주를 만들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문 실장은 내가 이 안주를 좋아할 것 같아서 장소를 여기로 정했다고 말했고 나는 정말 좋네요,라고 말했다. 소주는 처음처럼을 시켰고 나는 내 소주잔에 물을 따랐다. 문 실장은 얼마 전 외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프리랜스 여성 감독으로 일하는 고충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다. 누군가가 공유 사무실을 권해서 사용해 봤는데 광고 일을 하는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도 했다. '허세'까지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는 게 중요한 직종이다 보니 공유 사무실은 폼이 안 나는 게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사무실을 하나 얻을까 생각 중인데 일이 들어오는 추이를 보고 나서 결정해야겠다는 얘기까지 했을 때 민재 PD가 도착했다.


셋이 모이자 자연스럽게 내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예전에 회사를 다니며 있었던 이런저런 일과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나누게 되었다.  문 실장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광고들은 자기가 처음 일본에서 광고 공부를 할 때 유행한 분위기라는 얘기를 했다.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 예전 스타일이 살아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민재 PD는 요즘 어떻게 하면 카피를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며 내게 좋은 카피를 쓰는 요령에 대해 물었고 나는 그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는 내 근황에 대한 얘기를 좀 했고 다시 예전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언급하다가 내가 썼던  '커피가 착해서 커피에 반하다'라는 슬로건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광고의 감독을 했던 문 실장이 "그 슬로건 실장님이 쓰신 거였어요? 저는 몰랐는데."라고 말했다. 의외였다. 나는 문 실장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민섭팀이 아이디어를 다 내고 마무리를 할 때 다 좋은데 슬로건이 좀 약하다고 내게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고민을 하다가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봄날은 간다'에서 힌트를 얻어 쓴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곧이어 거짓말처럼 민섭이 나타났다.


그때가 일곱 시 반쯤이었는데 민섭은 TBWA  다니다 그만두는 동료의 환송회가 있어서 여섯 시부터 가게 안쪽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전에 비해 살이 많이 찐 민섭을 놀려댔지만(야, 너 살 만한가 보다, 여전히 술 무척 먹는구먼... 등등) 그는 너그럽게 웃으며 9월이면 애기 아빠가 된다고 말했다. 민섭까지 오니 예전 회사 사람들이 네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광고인들이  모였다고 광고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민재 PD가 왓챠 플레이 얘기를 하는 바람에 넷플릭스 등 우리 주변에 있는 영화 플랫폼에 대한 얘기를 한참 했고 요즘 가장 핫한 영화 '기생충'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보았을 정도로 좋았다고 했더니 문 실장은 두 번씩이나 볼 영화는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봉준호 감독에 대한 갖가지 찬사와 감탄에 이어 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를 칭찬하느라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PD들도 생각난 듯이 이 영화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인 박소담이 예전에 우리가 찍을 광고에 출연하기로 했다가 고사하는 바람에 무척 애를 먹었던 얘기를 했다. 영상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다들 영화에 대해 잘 알았고 마니아 기질이 있어서 영화에 대한 얘기가 계속되어도 질리지 않는 듯했다. 내가 계속 신나게 이런저런 영화 얘기를 했더니 문 실장이 "실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영화에 대해 잘 아세요? 안 본 영화가 없어..."라고 하길래 칭찬인 줄 알았으나 결국은 '당신이 영화에 쏟는 애정의 반 정도만 광고에 쏟았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성공했을 텐데' 쪽으로 흐르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만 머쓱해져서 아핫, 아핫 하고 웃기만 했다.


6개월 간 술을 끊어서 물만 따라 마시는 주제에 문 실장이나 민재 PD에게 부지런히 술을 따라줬더니 급기야 문 실장이 취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흐름을 좀 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이차를 가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며 문 실장이 계산을 했다. 밖으로 나와 예전에 잘 나갔던 실내포차 '뻐꾸기' 쪽으로 올라가다가 바로 옆에 있는 맨즈 샵 'Paul Han'이 열려 있길래 들어가 명호 형에게 인사를 했다. 명호 형은 대학 서클 뚜라미의 2년 선배인데 예전에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는 얘기만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수영장에 열심히 다니던 작년 여름 점심때 잠깐 수영을 하고 오다가 가게 앞에서 휴대폰 통화를 하고 있는 명호 형을 만나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페이스복으로 들어가 'Paul Han'을 검색했다. 가게는 그야말로 센스가 넘치는 셔츠와 팬츠, 스카프 등으로 가득했다. 페이스북 페이지엔 대표인 명호 형이 직접 모델까지 겸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예전 동료들과 만나 한 잔 하고 이차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명호 형도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회사 그만두고 놀러 다니는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늦은 시간인데도 가게가 열려 있는 게 신기했다. 예전엔 뻐꾸기에도 많이 갔는데...라고 말하자 명호 형이 그 가게는 예전 같지 않아서 자기도 이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처음 보는 문 실장과 민재 PD도 따라 들어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는 바람에 명호 형도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광고하는 사람들은 '이거'를 무척 좋아하나 봐!"라고 웃으며 형이 팔을 들어 올려 술 마시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게요. 저는 물만 마셨지만...이라고 말하기도 뭣해서 나는 그냥 네, 하고 가게를 나왔다.


문 실장의 차가 김봉남포차 주차장에 있는 관계로 멀리 갈 수는 없어서 맨즈샵 바로 옆에 있는 실내포장마차로 이차를 갔다. 역시 밖에 놓여있는 간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게살수프가 맛있어 보여서 그 안주와 새로 나온 '진로이즈백'을 시켰다. 문 실장이 "진로 이즈 백, 이라는 카피를 쓰다니!"라고 감탄하며 연거푸 소주를 마셨다. 안주는 맛있었고 대화도 즐거웠지만 어느덧 밤 11시로 달려가는 시간 때문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일어나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남양주에 사는 문 실장이 대리운전을 잘 불러서 가는지 확인한 후 가고 싶었으나 자꾸 불발되는 대리운전 매칭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민재 PD와 함께 작별을 고하고 전철을 탔다. 전철역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뭐야? 목소리가. 술 마셨구만."이라고 의심을 하길래 술을 마셔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시간이 되면 의례 목소리가 이렇게 힘이 빠지고 발음도 안 좋아진다고 부연설명을 해야 했다. 성북동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 실장에게 전화를 해보니 대리기사를 부르는 데 성공해서 잘 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허리도 아프고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피곤하네, 라고 중얼거리다가 예전에는 술이라도 마셨는데 이젠 맹숭맹숭한 상태로 술자리에 앉아 있느라 더 힘든 건 아닐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되돌아보니 나는 담배를 끊은 지 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회의가 끝나거나 술자리 멤버들이 담배를 피우러 가면 함께 흡연실에 가서 '마무리 토크'를 한다. 술자리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만 술자리에 가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간다. 내 이야기를 하고 또 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간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내가 없는 동안 친구들이 내 욕을 할까 봐 술자리에선 화장실도 가지 못한다'라고 쓴 것이리라. 세 번째 쓰는 금주일기가 자꾸 음주일기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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