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한우 직판장 식당 편
월요일을 맞아 '월조회(월요일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의 일환으로 종로 피카디리 1958에서 단돈 7천 원에 상영관의 유일한 손님으로 [로켓맨]을 보고 돌아온 나는 오후에 집에서 책도 읽고 새로 산 운동화도 빨고 뭔가 아이데이션도 좀 하면서 놀고 있었는데 퇴근시간이 지나자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 고기를 좀 먹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하하 웃으며 무슨 고기를 먹고 싶냐고 물었고 아내는 동네에 있는 '돈가래'에나 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거긴 돼지고기인데 당신 괜찮겠어?"라고 물었더니 사실은 소고기가 좀 먹고 싶긴 한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성신여대 앞에 있는 고깃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뒷산 쪽으로 올라가 버스를 타고 아리랑 씨네센터를 지나 성신여대 입구역에서 내려 아내가 올 때까지 죠스떡볶이 벤치에 앉아 리디북스로 소설을 좀 읽다가 아내를 만나 고깃집까지 걸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간판을 다시 한번 살펴보니 '돈암한우 직판장 식당'이라 쓰여 있었다. 우리가 처음 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집 이름을 '성북동소행성'이라고 짓고 처음 초대한 손님 중 한 분이었던 김영일 선생이 알려준 곳이었는데 이름이 길어서 우리 부부 둘 다 정확한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있었던 고깃집이다. 여기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진열장에 놓여있는 고기를 선택하고 고깃값도 미리 계산하는 정육식당 시스템이다. 우리는 진열장 앞에서 잠깐 고민을 하다가 33,000원짜리 '채끝등심'을 골랐다. 서빙하는 분이 내 앞에 가위와 집게를 놓고 간다. 우리 집은 늘 아내가 고기를 굽는데도 고깃집에 가면 언제나 가위와 집게는 내 앞에 놓였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내가 얼른 그걸 들고 자기가 굽는다. 이유는 내가 고기를 잘 못 굽는 것으로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 아내가 가위와 집게를 냉큼 가져가서 기름을 불판에 능숙하게 두른 뒤 고기를 구웠다. 요즘은 둘 다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물을 따라 마시면서 고기와 야채를 먹었다. 구운 소고기에 굵은 소금을 아주 조금만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상추와 깻잎은 고기를 씹지 않을 때 따로 장을 찍어서 먹었다. 소주나 맥주 없이 고기만 놓여있는 테이블이 새삼 신기했다.
내 뒤에 앉은 여자분이 살짝살짝 내 등과 부딪혀서 약간 신경이 쓰였다. 그 테이블엔 50대 초반 여성 둘과 60대 초중반 남성 한 사람이 한 팀이었는데 제일 젊어 보이는 여자분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현충일에 아파트를 보니까 태극가 건 집이 하나도 없더라고. 왜 현충일에 국기를 안 다는거야? 아무래도 문재인 정부가 못 달게 하는 거 같아. 나는 우파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야. 그런데 문재인은 정말 문제야.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진짜 문재인 경제가 문제잖아... 오빠, 빵을 사 먹고 싶어도 빵이 비싸서, 예전엔 오백 원 하던 게 지금은 팔백 원, 천 원 하는데 그걸 어떻게 사 먹어요? 오빠."
여자분은 밑도 끝도 없이 '오빠'에게 문재인 대통령을 욕했다. 혹시 특별한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 그러는 걸까 귀를 기울여봤지만 그녀의 의견은 도대체 중심축이 없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말을 억지로 들으며 얼굴을 찌푸렸지만 오빠라고 불린 남자분은 한술 더 떠서 요상한 예를 들어가며 우리 경제 풍토를 비난했다. "우리나라는 잘하는 놈 돈을 더 주는 게 아니라 그걸 자꾸 딴 놈들이랑 나눠주려고 하다고. 그러니까 잘하는 애들은 다 외국으로 도망을 가지. 아, 류현진이가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처럼 연봉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애? 어림도 없지! 걔네들은 연봉이 수천만 달런데, 우리나라에서 연봉 수백 억 받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이거 문제라고, 문제."
우리는 상대방이 들으면 자칫 싸움으로 번질까 봐 서로 목소리를 낮취가면서 "이러니까 홍준표 같은 인간들이 행세를 하지." "우리 또래 여자들 중에 저렇게 무식한 사람 진짜 많다니까..." 같은 소리를 거의 립싱크 수준으로 주고받다가 "내가 투표를 한 번도 안 해서 할 말은 없지만..."이라는 그 여자분의 허탈한 일갈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투표도 한 번 안 했으면서 저렇게 불평불만이 많다니. 아마 저 여자분은 후보자 약력이나 정책 읽어보기 싫어서 투표도 매번 포기했을 것이다. 우리는 잠깐 이런 사람들 만나서 기가 막혀 하지만 실제로 이런 정도로 수박 겉핥기 식 현실인식이나 정치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생각하니 당장 가슴이 답답해졌다. 성수동 살 때 "난 전두환이 좋아"라고 얘기하던 아저씨들 테이블 이후로 오랜만에 또다시 분노를 느끼며 즐기는 저녁식사였다. 그나마 둘 다 술도 안 마시고 고기만 먹어서 그런지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을 차분한 마음으로 흘려들을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 이차를 간다고 일어서길래 우리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오빠, 내가 돈 다 냈어,라고 나와 등이 부딪히던 여자분이 소리를 지르자 아내가 "제일 조용하던 여자가 돈은 혼자 다 냈네."라고 속삭였다. 고기를 다 먹고 이미 배가 불렀지만 왠지 섭섭해서 된장찌개와 공깃밥을 시켜서 또 먹고 일어섰다. 배가 불러서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고 싶은데 억지로 참는 거라면 무척 억울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없이 금주를 했더니 담담했다. 술을 안 마시면 안주도 덜 먹게 된다. 생각해 보면 기름진 안주를 먹고 곧장 술을 마셔 그걸 누르고, 술로 공격을 받은 식도와 위장을 또 다른 안주로 달래고 하는 과정을 계속 해왔던 것 같다. 물을 마시면서 파악하게 된 나이 음주 패턴이다. 사실은 어제도 서촌에서 파우저 교수님의 새 책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북콘서트에 뒤늦게 갔다가 맥주집에서 치킨에 물만 마시고 왔다. 어제는 온수진 씨 부부와 김성준 선배가 술을 끊은 우리 부부에게 수시로 맥주잔을 내밀며 놀렸지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치킨만 뜯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하고 아내와 마주 보고 웃었다. 사람은 가끔 이상한 짓을 하고 살아야 한다. 정상적으로, 하던 대로만 하고 사는 건 재미없다. 요즘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술 담배 안 하는 재미로 산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웃기지 말라고? 좀 웃기면 안 되나. 어차피 웃을 일도 별로 없는 세상인데.
(어제 저녁성북동 소행성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