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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r 31. 2023

세월호 엄마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리뷰

모친상을 당한 사람한테 문상을 간다. 향을 사르고 절을 주고받은 뒤 위로와 고마움의 말을 전한다. 상주와 함께 문상객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와서 육개장과 쌀밥을 떠먹는다. 옆에 앉아 있던 상주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살짝 웃는다. 그때 누군가 상주의 얼굴을 스마트폰으로 찍는다. 셔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상주의 얼굴이 굳는다. 혹시라도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상주가 기뻐하더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서다. 


이건 평범한 초상집 장면에서 상상해 낸 '왜곡된 가십'이지만 세월호 엄마들에겐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삶이 늘 이런 염려 속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수학여행 떠났던 자식들을 이유도 모르고 수장시킨 부모가 무슨 낯으로 웃고 무슨 낙으로 살아갈까,라는 섣부른 배려와 염려들. 여기에 반기를 들고 '그들이 합법적으로 웃을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연극 연출가가 나타났다. 안산 일대에서 코미디 연극으로 활동하던 연출가 김태현은 세월호 엄마들이 연극을 해보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들을 찾아간다. 막상 가보니 엄마들이 절실히 연극을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연극을 시작하는 순간 엄마들의 삶은 지금과 180도 달라진다는 것을. 김 감독의 설득과 회유 덕분에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 결성되었다. 


영화 《장기자랑》은 세월호 엄마들이 유가족 극단을 만들고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장기자랑을 무대 위에서 그들 대신 펼쳐보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개봉을 열흘 정도 앞둔 2023년 3월 24일 내가 참석한 CGV용산 시사회에는 영화에 출연했던 엄마들과 이소현 감독, 김태현 연출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원래는 세월호 관련 예고편과 인터뷰를 찍으려고 엄마들을 만났던 이소현 감독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스스럼없이 개인적인 심정을 쏟아내는 그들에게서 '스토리텔러의 본능'을 감지한 듯하다. '이거, 작품이 되겠는데?'라는 촉이 온 것이다. 


이후 벌어진 상황은 다소 상상을 초월한다. 엄마들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아, 그동안 우리가 너무 한쪽 이미지로만 소비되고 있었구나. 참사 희생자의 부모들은 기뻐하거나 즐겨도 안 되며 오로지 '피해자 프레임' 속에서 침울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구나. 배우들은 희곡을 읽어 나가면서 내재되어 있던 '표현 본능'이 되살아 났다. 다시 살아난 것은 표현 본능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슬퍼하느라 잊고 지냈던 시기, 질투, 자뻑 등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오욕칠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다 뿜어져 나온 것이다. 급기야 엄마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욕심을 내느라 극단이 깨질 위기까지 간다. 실제로 극단을 나간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폭풍을 잠재운 것 역시 '아이들의 이야기를 부모가 대신 무대 위에서 펼치고 싶다'는 맨 처음의 갸륵한 마음이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엄마들은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장기자랑을 하려면 어떤 구성이 나올까 연구했다. 극 중 캐릭터들은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엄마들의 구술과  4.16 단원고 약전(略傳)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이돌이 되는 게 꿈이었던 조가연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아영이 중심에 서고 패셔니스타 천지수,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지백희, 엉뚱 발랄한 매력의 장하늘이 그들 뒤에서 개성 있는 조연 역할을 맡았다. 다섯 아이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방미라, 한아영의 뮤즈이자 상상 속 친구인 루피까지 등장하니 한 편의 연극이 기승전결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엄마들은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커피를 배우는 등 그동안 거쳤던 다른 치료들은 효과가 있더라도 그 순간만 지나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연극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들은 비로소 살아가는 의미를 획득한 것은 물론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추모해 달라고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향도 세울 수 있었다. 


연극 《장기자랑》에서는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해 장기자랑을 하며 끝난다. 엄마들이 자식들의 교복을 입고 무대에 서서 혼신을 다해 연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이 연극을 4월 16일에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공연하려는 기획도 있었으나 결국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기엔 우리 사회가 아직 겁내고 가리는 게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안산 단원고 학부형이었던 일곱 명의 엄마들은 이제 세월호 엄마에서 벗어나 어엿한 연극배우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했으니까. 극단 노란리본은 2016년 '그와 그녀의 옷장'을 시작으로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장기자랑' '기억여행' 등 4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200회 이상 공연했고 세월호 9주기인 오는 4월에는 신작 '연속,극'을 공연할 예정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영만 엄마  이미경 배우는  이소현 감독에게 "4년 동안 포기 안 하고 찍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예진 엄마 박유신 배우는 "아이들을 너무 아프게만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내가 '막이 오르면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라는 서브 카피가 너무 평범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영화 속의 모든 대시와 동작에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채워져 있다는 뜻이고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채택한 카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속에서 끝까지 다투시던데 연극 '기억여행'에서 주인공 노란리본 역할은 누가 맡으셨나요?"라는 한겨레21 박다혜 기자의 질문엔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직접 연극을 보고 확인하란다). 엄마들이 웃는 건 처음부터 불법이 아니었지만 '합법적으로 웃게 해 주겠다'던 김태현 감독의 바람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 같다. 엄마들의 서툰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하지만 다행이다. 그들이 연극을 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당당하고 행복해 보이니까.  4월 5일 개봉, 92분 상영, 12세 이상 관람가다. 식목일에 나무 한 그루 심는 기분으로 가까운 극장에 가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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