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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2. 2023

다섯 시간짜리 연극의 황홀경

연극 《이 불안한 집》리뷰


그리스 비극을 볼 때는 좀 긴장하게 된다. 지나치게 오소독스하거나 너무 무겁게 만들어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쉬는 시간까지 합해 다섯 시간짜리 연극일 경우엔 더 그렇다. 나는 혹시라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리거나 배경 지식이 너무 없어 맥락을 놓칠까 봐  극장 앞 맥도날드에 가서 아내가 내려받아 준 프로그램북을 보고 노트에 메모를 해가며 예습을 했다. 다행히 연극은 초반 코러스들의 능청부터 빵빵 터지고 배우들의 고른 연기력 덕분에 아무런 문제 없이 작품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김정 연출은 아무래도 괴물인 듯싶다. 전쟁의 승리와 무사 귀환을 위해 사랑하는 딸을 신들에게 바친 아가멤논과 그런 남편을 증오해 복수를 하려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1부부터 대사 배치나 캐릭터 구축이 예사롭지 않고 배우들의 연기에 허점이 거의 없도록 조련을 했다. 연극을 올리기 전 배우, 스태프들과 얼마나 대화를 많이 나누고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치도록 독려했는지 느껴졌다. 모든 연기자들의 발음과 동작이 뛰어나지만 특히  클리템네스트라 역의 여승희와 엘렉트라 역의 신윤지 배우의 연기는 기가 막혔다.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캐릭터를 주로 맡던 윤성원 배우의 연기 변신도 놀라웠다.


복수극을 완성하는 2부를 지나 현대로 갈아탄 3부에서는  2,500년 전의 비극이 정신병원 의사와 환자의 이야기로 바뀌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은 그리스 비극이 얼마나 인간의 속성을 잘 간파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증이다. 극본을 쓴 지니 해리스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재해석한 극본을 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소개되지만 이미 영국에서 대표적인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뛰어나고 고급스러운 극본에 의욕 넘치는 천재의 연출, 그리고 사력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다섯 시간의 황홀경을 경험했다. 극장에서 만나 같이 연극을 본 분들과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들어와 그냥 자려다가 내일은 리뷰를 쓸 시간이 없는데 그냥 자기는 아까워서 짧게 리뷰를 남긴다. 그러니까 시간 되면 이 연극 놓치지 말고 꼭 보시라는 얘기다. 9월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강추,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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