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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29. 2019

금주일기 6

<백탑파의 밤> 편


이름하여 '백탑파의 밤'이었다. 소설가 김탁환이 2003년 [방각본 살인사건]부터 시작해 얼마 전 [대소설의 시대]까지 연암 박지원과 홍대용, 이덕무 등 실학파들이 탑골공원 안 원각사지10층석탑 아래 모여 새로운 학문과 아이디어를 논하던 모임 '백탑파'에 관한 연작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백탑파를 아끼고 지지한 사람은 지난 16년 간 그들에 대한 소설을 원고지 일만 매 분량으로 써낸 소설가 김탁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019년 6월 27일 저녁, 서울시청 시민청에 있는 '바스락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민음사가 김탁환의 새로운 소설 [대소설의 시대] 출간을 축하하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북토크를 열기 때문이었다. KBS 정용실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그 행사에 나도 운 좋게 독자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롯데백화점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청을 향해 가는데 민음사 박혜진 차장으로부터 오늘 행사의 뒤풀이 장소를 알리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어 지하 2층으로 내려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며 김탁환 작가에게 사인을 받고 있었고 행사장 안에서는 밴드와 뮤지션들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나는 정용실 아나운서와 최예선 작가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패널로서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받을지 잠깐 이야기를 했다. 심리치유자 정혜신 이명수 커플이 도착했고 멀리 제주도에서 올라오신 강보식 선생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박혜진 차장, 김서희 씨, 박순혁 씨(Vincent Park) 그리고 김탁환 작가의 오랜 팬인 이정은 씨,  권수현 씨, 윤재호 씨와도 반갑게 악수를 했다.


7시가 되자 정용실 아나운서가 무대 위로 올라가  "소설이 너무 안 팔려서 멸종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런데 멸종 위기에 놓인 이 소설을 아직도 열심히 쓰고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설가 김탁환과 그의 독자들입니다. 김탁환은 백탑파에 대한 소설을 계속 써왔는데 그 원고의 양이 일만 매에 달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도 백탑파들처럼 한 번 놀아보죠."라고 하며  '백탑파의 밤' 시작을 알렸다. 김탁환 작가가 나와 인사를 하며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16년 간 백탑파에 대해 쓰고 나니 이제야 겨우 반쯤 온 것 같다면서 앞으로도 한 16년 정도 더 써야 할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독자들의 박수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이어 소리꾼 최용석 씨가 나와 '백탑파 연대기'를 판소리로 엮은 공연을 했다. 당산동에서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는 최용석 씨는 창작 판소리를 만드는 젊은 소리꾼인데 김탁환 선생이 먼저 연락을 해서 친해진 사이라고 했다. 판소리는 김탁환 작가가 백탑파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작품들의 내용과 특징을 쪽집게 과외하듯 되짚어줘서 소설을 읽은 사람은 물론 읽지 않은 사람도 단숨에 백탑파의 계보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신통력을 발휘했다. 짧은 시간에 '사랑가' 한 대목까지 들려준 멋진 무대였다. 이어 영혼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시와가 나와 자신은 김탁환의 소설 중에서도 <목격자들>을 가장 좋아하는데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겠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 뒤 맑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소설과 어울리는 노래 두 곡을 들려주고 내려갔다. 이어 오늘의 음악 전반을 준비해 준 뮤지션 정재영 씨가 리더로 있는 밴드 '착한밴드 이든'의 아름다운 연주와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서울대에서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정병설 교수가 나와 프랑스의 소설 '엘로이즈'를 예로 들면서 당대에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 중 지금은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는 얘기를 하며 다행히 우리는 김탁환이라는 작가 덕분에 대소설이 유행하던 시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운을 떼었다. 그러면서 농담 삼아 요즘은 [대소설의 시대]라는 소설이 나와 학생들에게 이 책을 던져주기만 하면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게 되어버린다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진작부터 이야기에 미친 민족이었음을 이야기하며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생계를 해결했던 일화도 들려줬다. 그러면서 삼백 년 전쯤 서울 하고도 이쯤에 백탑파들이 모여 있었을 텐데 삼백 년 후에 우리가 또 비슷한 곳에 모여 백탑파의 밤을 열게 되었다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묘하게 감동시키고 내려갔다.


이명수 선생은 뭔가 새로운 일을 할 때 흔히 하는 표현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라는 관용어구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얘기로 축하의 말을 시작했다. 사람은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것인데 교수를 접고 전업작가로 전환한 김탁환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소설을 굉장히 많이 읽는 사람이라 아는데 김탁환은 당대 최고의 소설가라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꾸준하고 성실한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게 괴롭다고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재미있어하고 실제로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는 문학이라는 외피에 기대서 너무나 미성숙하게 구는 작가들이 많은데 김탁환은 그런 면에서 성숙한 작가라고 했다. 그래서 김탁환은 사회파 소설가가 아니라 '성숙파'소설가라는 농담도 했다. 책에 '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온 기분'이라는 작가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시간이 갈수록 내면이 성장해 가는 게 보여서 기뻤다고 했다. 도대체 자기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김탁환은 정말 성숙파다, 라는 역설적인 얘기로 끝을 맺었다.


다시 정용실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고 무대를 정리했다. 백탑파의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김탁환 작가를 가운데 두고 그 옆으로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의 이정모 관장과 최예선 작가, 그리고 독자 대표로 내가 앉았다. 요즘 각종 저술과 방송 활동으로 바쁜 이정모 관장은 자신을 '박물관의 꽃'이라 소개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한 달 전 금주선언 직전에 만났는데 그동안 하루에 이만 보씩 걷는다고 하더니 몰라보게 날씬해져 있었다. 그는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처음 접했을 때 연예를 '연애'로 잘못 알고 계속 소설을 읽으면서 '도대체 연애는 언제 하는 거야?'라고 투덜거렸다고 말해 사람들을 또 웃겼다. 최예선 작가는 백탑파 시리즈 이외에도 자신이 사랑했던 김탁환의 소설들에 대해 말했고 특히 이번의 경우 책이 나오기 전 그의 원고를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기쁨과 감탄에 대해서도 말했다. 김탁환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편집자와 함께 작품을 의논하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탁환은 '그게 유리하니까'라는 우문현답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독하다 토요일'이라는 작은 독서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우리가 한국 소설을 읽어야 하는 당위(에 대해서도 말하려 했으나 그렇게는 못하고)와 그로 인해 김탁환이라는 작가를 직접 모시고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 대해 회원들과 같이 특강을 들을 수 있었던 행운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측은지심을 탑재한 삼백 년 전의 특급 연예인' 달문의 이야기는 물론 18세기 조선에 대소설이라는 엄청나게 길고 유장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데 마침 고전소설을 전공한 김탁환이 학부생활 내내 그 책들을 고생스럽게 읽어야 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이렇게 멋진 역사추리소설로 엮어져 나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기쁜 건 그때 서울문화재단의 오진이 전문위원이 연결해줘서 우리도 처음 가봤던 독하다 토요일 특강 장소 '연희문학창작촌'에 김탁환이 홀딱 반해 당장 작가 레지던스를 신청하고 입주 작가가 되어 [대소설의 시대]를 썼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기서 어떤 작품을 완성해 내놓은 작가는 김탁환이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대소설의 시대]라는 작품이 탄생하는 데 0.00000001% 정도는 기여를 했다고 자의적 숟가락을 냉큼 얹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돌아다니다 보면 엄청난 이야기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걸 작품으로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써야 작가인 것이다. 김탁환은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김탁환 작가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18세기에 대소설이라는 장르가 유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 책은 그런 사실 말고도 고전소설을 통해 풀어놓은 김탁환의 작가론이기도 하다. [대소설의 시대]에서 23년 간 소설을 써온 임두는 후배들에게 "공든 탑을 무너뜨려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헤밍웨이의 말과 같은 것이며 "하루를 양분해 절반은 읽고 절반은 써라.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으면 작품이 쪼그라든다"라고 한 것은 '모든 훌륭한 작가는 훌륭한 독자이기도 했다'라는 명제를 주인공인 소설가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작품은 역사추리소설이라는 형식과 그 속에 스며있는 작가론 두 가지를 모두 전하려 한 김탁환의 '이중 플레이'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백탑파의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다"라고 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주인공들이 쇄잔해지는 걸 보는 것은 괴롭고 김빠지는 일이다. 그러니 작가는 늙어가시더라도 이명방이나 김진은 언제나 젊은 시절로 유지해 줬으면 좋겠다...


이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작가의 대답도 들었는데 아홉 시가 가까워지자 요란한 음악과 방송멘트(시민청은 저녁 아홉 시가 되면 소등을 한다는)가 나와 정용실 아나운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말 시간이 되면 건물 안의 불이 모두 꺼질 기세였기에 우리들은 서둘러 북콘서트를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의 질문 시간엔 나의 아내 윤혜자도 마이크를 들고 '독하다 토요일이라는 모임 덕분에 한국 소설을 일 년에 최소 열두 권은 읽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김탁환의 소설을 비롯해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읽어나가겠다'는 심정을 토로했을 뿐인데 의외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모임을 끝내고 뒤풀이 장소로 가기 전에 아내가 '재섭 씨가 여기 왔었는데 어느새 사라졌다'고 말하길래 얼른 전화 통화를 하고 정문을 향해 뛰어올라가 나의 대학 써클 뚜라미의 친구이자 독하다 토요일 2기 멤버였던 재섭과 성은 씨 부부를 만나 가까스로 인사를 했다.


뒷풀이 장소로 간 '아사칸 무교점'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내가 아내 얼굴을 쳐다보며 "어떻게 할까?"라고 물었더니 "티켓을 쓰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갑자기 6개월 금주를 선언하면서 여행을 제외하고는 예외조항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티켓을 딱 세 장 마련했는데 한 장은 이미 진도 씻김굿 보는 날 썼고 이제 두 장이 남은 것이었다. 사실은 김탁환 작가와 낮술 약속을 해놓은 게 있어서 그때 쓰려고 했으나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 요원하기도 하려니와 또 이런 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마시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김탁환 작가도 "오늘은 맥주 한 잔 하시죠?"라고 권해서 우리는 가열차게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독하다 토요일 멤버 중 아내 말고는 유일하게 참석하게 된 김은주 씨도 너무나 즐겁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차까지 가서 실로 많은 이야기와 웃음으 나누었다.

결국 제목은 금주일기지만 사실상 '음주일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에겐 가끔 축제의 시간이 필요한 것을. 그동안 축제를 남발해 온 우리 부부가 반년 간 술을 안 마시기로 한 건 술 자체가 싫거나 건강을 염려해서가 가 아니라 좀 더 즐거운 시간들을 많이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제의 일탈은 충분히 정당성이 있는 '티켓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한 장 남았다. 그리고 금주의 시간은 5개월이 남았다. 음, 좀 아득해진다. 큰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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