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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30. 2023

제주에 사는 사진작가의 감미로운 고독

제주에서 만난 안웅철 작가

이번 제주 여행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안웅철 작가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저 혼자 제주대학교 특강을 내려왔을 때 시간이 안 맞아 뵙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번에 아내와 함께 풀기로 했던 거죠. 마지막 날은 제주시에 있는 모텔에서 잤으므로 같은 구역에 있는 안 작가님의 거처까지는 금방이었습니다. '에버웨딩'이라는 건물에 차를 대니 마침 안웅철 작가가 고양이들 사료를 주려고 이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마침 마주친 웨딩센터 여성 직원과도 인사를 했습니다.


안웅철 작가의 집은 정말 예술가의 집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널찍한 거실엔 기다란 소파가 여유 있게 자리 잡았고 벽엔 사진과 음악 CD들, 그리고 카메라와 LP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윤영미 아나운서가"웅철이 집에 가 보면 놀랄 것"이라고 했던 말이 실감 났습니다. 심지어 욕실의 정사각형 타일이나 햇빛이 들어오는 창도 남달랐습니다. 아내는 주방에서 안 작가가 모은 오래된 그릇들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안 작가가 만들어준 커피와 즉석에서 칼로 썰어 구운 빵을 먹으며 왜 하필 이런 곳을 아지트로 삼을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처음 제주로 내려올 생각을 했을 때 안 작가가 집을 구하는 기준은 아파트나 타운하우스를 제외한, 좀 특색 있는 공간이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웅철 작가는 제주도의 부동산을 열 군데도 넘게 돌아다니며 "아파트 빼고, 타운하우스도 빼고, 사장님이 다니다가 '도대체 여긴 뭐야?' 하는 데가 나오면 연락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챗GPT 시대를 맞아 질문의 중요성이 많이 대두되는데 저는 안웅철 작가의 이 질문이야말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절묘한 주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건익 실장님 얘기도 했습니다. 제가 안 작가를 만난 건 저와 함께 근무하던 김건익 실장님을 찾아왔을 때였거든요. 정작 제주도가 고향인 김 실장님은 서울에 살고 안 작가님이 제주에 터를 잡은 것도 재미있는 아이러니였습니다. 사진과 여행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안 작가가 좋아하는 뉴욕과 홍콩 이야기를 했고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을 때 드는 생각들에 대해서도 얘기도 했습니다. 안 작가가 찍는 바다나 숲 사진은 정말 깊이와 디테일이 다릅니다. 제가 그 얘길 했더니 안 작가가 요즘 자주 쓰는 카메라들을 꺼내서 각각의 특징과 그걸 구입하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요즘 '가든 블루'로 핫한 김선형 작가의 사진 얘기를 했고 김중만, 강영호, 조선희 작가 등 당대의 사진가들 얘기도 했습니다. 여행을 다니디 보면 연락이 안 될 때도 있고 별 일이 다 생기는데 제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사진작가로 나온 숀펜 얘기를 했더니 안웅철 작가가 그 영화를 열 번도 넘게 보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거기서 라이프지에 실릴 마지막 사진을 찾으러 벤 스틸러가 돌아다니던 이야기와 마지막 히말라야에서 함께 표범을 만나는 순간을 이야기하며 다들 가슴 벅차했습니다. 숀펜이 "어떤 건 사진으로 찍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게 더 좋아. 피사체를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대사를 하는데 안웅철 작가도 그 영화를 본 후엔 대상을 찍기 않고 십 분이나 이십 분 정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한 편의 잘 만든 영화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지 잘 알 수 있는 에피소드죠.


안 작가가 꺼내 놓은 안경테들을 구경하고 한쪽 벽에 가서 그동안 작업했던 LP 재킷들도 살펴보았습니다. 김현철(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 소리두울, 장필순, 따로또같이와 들국화, 전인권 등의 아티스트 이야기는 그대로 타임머신이 되어 주었습니다. 안 작가가 군대 가서 선물로 받은 따로또같이 앨범에 있는 아티스트들의 친필 싸인은 군대 가기 전부터 서울스튜디오를 드나들며 뮤지션들과 친분을 쌓았던 안 작가의 남다른 이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제가 산울림소극장에서 따로또같이 공연을 두 번이나 본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울렸습니다. 렌터카 회사인데 열두 시 반납시간이 지났다는 통보였습니다. 시간을 보니 열두 시 오 분이더군요. 저는 한 시간 정도는 늦어도 된다고 들었는데요?라고 했으나 "누가 그런 소릴 해요?"라는 렌터카 직원의 일갈에 꼬리를 내리고 얼른 안 작가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제주에 사는 사진작가의 감미로운 고독도 렌터카 반납 시간을 이기진 못했습니다. 자동차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가서 소설책을 읽다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다 창밖을 보니 눈이 펄펄 내리는군요. 제주에서의 꿈같은 며칠이 휘리릭 하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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