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Jan 30. 2024

고양이 순자의 존재론적 의미

말하는 고양이 순자와의 대화

하루 종일 집에서 원고를 쓰거나 뭔가를 뒤적이며 읽다 보면 진짜 무위도식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무의미하거나 '소피스트케이션'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작가들도 다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을 억지로 해본다. 그래도 우체국 직원이나 택배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가서 꼬박꼬박 물건을 수령하다 보면 겸연쩍어질 때도 있다. 추리닝을 입어서 그럴까. 머리라도 정리를 하고 있을 걸 그랬나. 직장을 오래 다녀서 아직도 물이 안 빠진 것이다. 택배원이 인터폰을 눌러도 대답을 하지 말아 볼까? 에이, 그분들은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실 텐데 괜히 혼자 이러지. 요즘 새 책을 쓰느라 강연도 안 하고 다른 아르바이트도 안 하는 나는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번민할 때가 많다.  


한편, 고양이 순자는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뒹군다. 아내와 내가 없는 침대 위에서 몸을 동글게 말고 내쳐 자다가 저녁이면 일어나 잠깐 활동 같지 않은 활동을 한다. 손님이 오면 와서 참견을 하고(손님 친화적인 고양이다) 아내와 내가 마루에서 밥을 먹으면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어느 날 아침 순자와 대화가 가능한 아침 시간에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심심하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성준 : 야, 너 요즘 냉장고 앞에 동상처럼 자주 서 있더라.

순자 : 그랬어? 난 의식하지 못했는데.

성준 : 그렇게 가만히 서 있으면 좀 이상하지 않냐?

순자 :뭐가 이상해?


성준 :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존재론적 회의가 오지 않느냐는 거지.

순자 : 뭐래...

성준 : 사람은 쓸모가 있어야 하거든. 이 사회에서......

순자 : 너나 해.

성준 :?


(순자가 다시 냉장고 옆으로 가더니 앉는다)


순자 : 나는 존재론적 의미 같은 거, 다 쉣이야.

성준 : 그래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가야.......

순자 : 그래서 인간은 불행한 거야. 실존주의 몰라?

              너나 나나 그냥 세상에 던져진 거라고!

성준 : 야, 넌 글도 모르는 게 실존주의를 어떻게......

순자 : 넌 캐비초크 챙겨 먹고 글이나 써. 난 잔다.


어느덧 해가 떴다. 실존주의 고양이 순자에게 또 당했다. 언젠가는 순자를 꼭 이겨야지 생각하며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택배 아저씨가 오면 집에 없는 척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순자와 칼럼의 상관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