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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Feb 10. 2024

지혜롭고 용감한 어느 영화감독의 부탁

켄 로치의 《마이 올드 오크》


이런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관객(1만 9천 명)을 만나고 말 영화는 아니라는 오동진 평론가의 페이스북 담벼락 글을 읽고는 ’극장 가서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에 아내가 EBS에 캔 로치 감독이 나온 프로그램을 보고 바로 《마이 올드 오크》를 예매했다. 로치 감독은 올해 88세다. ’올드 오크‘는 영화의 주인공 TJ가 운영하는 펍의 이름이다. 첫 장면에 가게 간판 글씨 중 ’K‘가 비뚤어진 걸 바로잡는데 잘 안 되는 장면은 탄광촌이었다가 쇄락한 이곳 더럼을 상징해 주는 듯하다. TJ도 한때는 광부였던 아버지를 위해 투쟁하던 씩씩한 전사였지만 지금은 이혼당한 뒤 쓰러져 가는 펍을 운영하며 겨우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기쁨은 자살을 하려던 날 바닷가에서 나타나 자신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 준 강아지 마라뿐이다. 여기에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시리아 사람들은 오랜 독재정권의 폭정과 내란을 피해 겨우 영국의 산골로 살러 온 것이다. 사진을 찍는 십 대 소녀 야라가 마을 청년에게 봉변을 당하지만  TJ가 그녀를 감싸고 도움을 준다. 펍에 와서 파인트 맥주를 마시며 시름을 달래는 오랜 친구들은 그런 TJ를 못마땅해한다. 외국 놈들이 들어와 물을 흐리고 집값을 떨어트리고 있는데 술집 주인이 그들을 감싸며 천사 흉내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제발 우리가 와서 술 마시는 공간만큼은 남겨 달라는 그들의 부탁에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TJ가 바라는 게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같이 먹고 같이 살자는 얘기다(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 어려울 때는 위로 치고 올라갈 힘이나 용기가 없으니까 비겁하게 희생양을 찾기 마련인데 우리가 그래서야 쓰겠냐는 말이다. 우리도 어려운데 누굴 돕냐는 입장과 어려울수록 같이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세계관의 대립은 사회파 감독 켄 로치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이야기이고 이런 감독이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한다는 건 우리 문화사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직선적으로 할 얘기를 다 하면서도 헐겁지 않은 짜임새에 놀랐지만 가장 감탄한 것은 배우들 몸매가 주는 ’사실성‘이었다. 이 영화엔 늘씬하거나 피부가 매끄러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좋지 않은 식생활과 스트레스는 몸에 나타난다. 퉁퉁한 어깨와 처진 배, 탄력 없는 근육, 매끄럽지 않은 피부 등은 이 영화를 극사실주의로 만들어준다. TJ 역을 맡은 배우는 원래 운동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직한 얼굴로 맥주를 따르거나 강아지 마라의 이름을 힘껏 외치는 그의 연기엔 진정성이 넘친다.


비록 힘든 처지지만 무조건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야라도 인상적이었고 마라가 큰 개에게 물려 죽은 뒤 상심하고 있는 TJ에게 음식을 가져와  ”먹는 것을 보기 전엔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하는 야라의 엄마도 감동이었다. 판타지에 가까운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전하는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제안처럼 느껴졌다. 제발 약자들과 연대하라고, 제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 지혜롭고 용감한 감독이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아울러 그의 뒤를 잇는 똑똑하고 세련된 감독들이 많이 나타나면 좋겠다. 지금 가까운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보시기 바란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는 따지고 보면 평생 몇 편 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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