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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10. 2024

나도 내 이름은 싫다

편성준이라는 이름이 가진 뜻

<미오기전>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는 김미옥 선생이 중앙일보에 쓴 칼럼에서 자기 이름이 '굴러다니는 살찐 양'이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내용을 재밌게 읽었다. 그 칼럼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내 이름의 뜻은 온당한가 한 번 따져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작명소에서 많은 돈을 내고 지었다는(생전에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심) 내 이름은 정성 성(誠) 자에 준마 준(駿)이다.


정성 성은 '말한 대로 이룬다'는 뜻이니 매우 고지식하고 에누리 없는 인생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문헌을 찾아보면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사마광에게 그의 제자 유안세가 “인생의 좌우명이 될 글자를 하나만 고른다면  어떤 걸 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사마광은 서슴지 않고 “정성 성(誠)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심한 일이다. 일단 글자를 하나만 고르라고 떼를 쓰는 것부터 어리석다.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순적인 일이 많은데 한 글자로 깔끔하게 결론을 내라 추궁을 한단 말이가. 그것도 제 스승한테.


준마 준 자는 더 짜증 난다. 駿馬(준:마)는 '뛰어나게 잘 달리는 [駿] 말[馬]'을 이르는데 여기엔 함정이 숨어 있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순자(荀子)는 '준마라도 한꺼번에 열 발짝을 뛸 수 없고, 둔마라도 천리를 가는 것은 쉬지 않는 덕이다'(騏驥一躍, 不能十步; 駑馬十駕, 功在不舍 - '荀子'·勸學)라는 말을 남겼다. 즉 '너는 요행수로 살기는 틀렸으니 죽으나 사나 열심히 달리고 노력해야 겨우 남들처럼 살아갈 것이다'는 작명가의 저주 내지는 '알리바이'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름에서 마음에 안 드는 하이라이트 부분은 바로 '편(片)이라는 성이다. 절강(浙江) 편(片)씨는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으로 활약한 편갈송 장군이 그 시조다. 편 씨는 본래 이 씨였으나 편갈송의 조상 중 그의 충절에 감탄한 임금이 '편'이라는 새 성을 내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친한파였던 편갈송 장군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 때도 조선에 파견되어 원군으로 활약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간신 정응태의 모함을 받아 경주 금오산에 정착하게 된다. 황당한 건 이때 역적으로 몰려 배를 타고 도망가다 배가 쪼개져 거의 죽을 뻔했는데 그래서 조각 편 자를 성으로 쓰게 되었다는 야사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중국에서 가져온 성인데도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옛날 어른들도 구라가 장난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평범한 성이 부러웠던 나는 나와 같은 편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거북해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내 성이 김 씨나 이 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반평생을 살았다.  그런데 작가가 되고 나서 그래도 내가 편 씨라서 독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더 잘 기억해 준다는 걸 깨달았다. 더구나 아내가 "당신 이름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김성준이나 이성준보다는 차라리 편성준이 나아. 발음도 그게 더 잘 어울리고."라고 말한 뒤부터는(서촌에 사는 김성준 선배, 죄송합니다) 내 성에 대한 원망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이름은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잘 된 이름이 좋다고 하나 그건 대부분 결과론일 뿐이다. 한때 기업 브랜드명의 최고는 쏘니(SONY)였다. 두 음절의 간단함,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이 발음되는 항상성,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은 플렉시블 한 자세 등이 선정의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쏘니를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애플(APPLE)을 이야기한다. 애플이라는 이름의 간결성, 깨문 자국이 있는 로고와 한 천재 물리학자와의 관계 등 이 이름 역시 스토리텔링이 풍부하지만 사실은 애플 역시 스티브 잡스의 그림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른 자체엔 좋고 나쁘고 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름을 지을 때는 그 사람의 바람이나 마음이 거기 담기기 마련이다.  꼭 한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과 낸시라는 이름은 느낌부터 너무 다르다. 이름에 대한 글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건 카피라이터 윤준호 선배(시를 쓸 때는 윤제림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다)의 '재춘이 엄마'라는 시다. SK광고에도 쓰였던 이 시를 다시 한번 소개한다. 내가 아는 한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의 부모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글은 없는 것 같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거기엔 당신을 낳고 기른 분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좋은 이름 나쁜 이름은 없다. 그 이름에 맞게 살아가든 거부하며 살든 그것도 당신 마음이다. 남 생각할 줄 알고 떳떳하게 존재증명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이름을 남긴다. 사실은 이름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호랑이도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 말고 사람은 죽을 때 각자 이름을 저승으로 가져갔으면 하는 게 요즘의 내 마음이다.


재춘이 엄마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 )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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