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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섹스'라는 말

연극을 본다는 것에 대하여

by 편성준


LG아트센터에서 《벚꽃동산》을 두 번째 볼 때였다. 극의 종반부에 강현숙이 황두식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상황이 괜찮았으면 굿바이 섹스라도 하고 헤어졌을 텐데 그럴 처지가 못 되네요, 라고 얘기하자 내 앞좌석에 앉아있던 남자 고등학생 둘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걸 보고 귀여워 속으로 많이 웃었다. 원작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끝까지 망설이는 로파힌이 미운 바랴가 실수하는 척 그를 부지깽이로 한 대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사이먼 스톤은 이렇게 각색한 것이다. 나는 백 년 전 극본을 그대로 재현하는 정통극 벚꽃 동산도 여러 번 보았고 그때마다 좋았지만 이렇게 시대 흐름에 맞게 각색한 벚꽃 동산 역시 좋았다. 몰락해 가는 재벌가 이야기로 바꾸는 바람에 선대의 유산인 '벚꽃 동산'에 대한 회한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서로 다른 성격과 인생 스토리를 가진 인간들이 모여 벌이는 왁자지껄 희비극은 시대와 배경을 초월해 언제나 페이소스라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나저나 그 고등학생들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이라고 해서 왔는데 굿바이 섹스 같은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이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 단어가 야해서가 아니라 그게 '어른의 세계'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주는 클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 강철수 만화를 보다가 여인숙에서 섹스를 마친 남녀가 옷을 입을 때(발바리가 몰래 훔쳐보는 장면이다) 여자가 "사실은 미스터 김을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다른 남자 얘기를 하자 남자도 담담히 그걸 들으며 와이셔츠를 입는 장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똑같지는 않더라도 그런 이상하고 슬픈 장면들은 인생에서 가끔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꾸며낸 재미있는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긋 누군가 살아온, 또는 듣거나 목격한 인생을 압축해서 잠깐 살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고등학생들은 그런 면에서 행운아다. 또래들보다 먼저 어른의 세계를 얼핏 보았다는 자부심은 20대 내내 흔들리는 자신감을 붙들어 주는 작은 위안 또는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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