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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적 상상력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연극

김연민 연출《전기 없는 마을》

by 편성준


때로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행동이나 현상이 원인이 되어 인류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챗지피티(ChatGPT)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공지능(A.I) 시스템인 ChatGPT는 한 번 대화하는 데 대략 생수 한 병을 쓴다. 인공지능이 컴퓨터를 가동할 때 발생하는 열을 식히려면 다량의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전기 부족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과학자들의 염려에 개연성을 더해주는 에피소드다.


연극 《전기 없는 마을》의 작가 김연민 연출은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온 마을 이야기를 듣고 '그렇다면 전기가 가장 먼저 사라지는 마을도 있지 않을까'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래의 어느 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전기를 끊는 일을 하는 이든과 재희라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다. 2인 1조 인 이 팀은 인류 멸망에 이르는 전쟁 이후 자신이 왜 전기를 끊고 다녀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작업 도중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지만 결국 자신들이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데이터였음을 알게 된다. 즉, 이들은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 곳에서는 이들을 관찰하는 A.I 재하가 있고 또 다른 차원엔 이들을 창조하고 지켜보고 반복해서 그들을 만나는 인간 프로그래머 영란이 있다.


이야기가 복잡해졌는데 쉽게 말하면 이 연극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다중 우주나 디지털 트윈, 이스터 에그 같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무대 위에서 실제로 구현해 보는 작품이다. 길게 이어진 직사각형의 무대와 중앙의 미디어월은 이러한 연극의 주제를 형상화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선택이다. 거기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한몫한다. 이든과 재이 역의 윤성원과 이다해는 감정의 기복 없이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휴머노이드 역을 빠른 대사와 동작으로 잘 소화했는데 슬픈 상황에서도 명랑한 목소리를 내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역설적으로 슬픔이 밀려오면서 두 사람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천 개의 파랑》에서 연재 역을 맡았던 최하윤 배우가 재하 역을 맡아 역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고 프로그래머 영란 역은 강애심 배우의 관록과 정확한 딕션 덕분에 어려운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사건 없이 대사와 시퀀스가 이어지는 연극을 힘들어하는 나 같은 관객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연극은 국립극단의 [창작공감; 연출]에 당선된 후 연출과 배우들이 모여 공부를 많이 한 작품이다. 미래와 기술에 대한 책과 리서치, 강연, 세미나 등을 거듭했고 각자의 스토리를 써와서 함께 낭독하고 고쳐보는 과정도 거쳤다. 그만큼 사전 지식이 쌓였기에 다소 어려운 개념들도 무리 없이 작품에 녹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념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한 80분을 견디는 건 '기-승-전-결 식 스토리를 좋아하는' 나 같은 관객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극이 끝나고 로비에서 윤성원 배우를 만나 그런 소감을 전했더니 김연민 연출이 의도한 바가 바로 그런 형이상학적인 밀도였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늘 아침에 리뷰를 쓰려고 인스타그램 피드를 뒤져보니 의외로 '김초엽 소설 느낌이 났다'라는 소감이 많았다. 미래와 SF를 다룬 작품이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양가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금 김초엽의 소설이 SF 분야를 넘어 당대의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감탄과 부러움이 하나였다면, 다른 하나는 SF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자장이 좀 더 넓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SF=김초엽' 정도로 규범화시켜버리기엔 너무나 많은 거장들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실험적인 연극을 보고 김초엽 소설을 떠올리는 관객이 여러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2024년 7월 11일에 초연했고 8월 4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상연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형이상학적 탐구를 경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극이니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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