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 에세이 『오세혁의 상상극장』
집안 형편이 어려워 PC를 마련할 수 없었던 소년은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 룸메이트의 컴퓨터로 '디아블로2'를 알게 되었다. 낮에는 학생, 밤에는 게임 속 '바바리안'으로 살아가던 소년은 어느 날 TOM SAM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미국 고등학생의 도움을 받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는 어떤 상처로 인해 학교를 가지 않고 매일 밤 디아블로2를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바다 건너 사는 그 고등학생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건 매일 밤 같이 디아블로2를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의 낮이 소년에게는 밤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소년은 그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학기를 휴학했다.
희곡작가이자 뮤지컬 제작자인 『오세혁의 상상극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 대목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게임 때문에 대학을 한 학기 휴학하는 인간이 도대체 제정신이란 말인가. 그것도 게임에 미쳐서가 아니라 게임에서 만난 실명도 모르는 미국 고등학생과 밤마다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서라니 말이다. 이것 말고도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에피소드들이 이 책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매일 오락실에 드나드는 아들이 걱정된 아버지가 『삼국지』 첫째 권을 다 읽으면 백 원을 주고 둘째 권을 다 읽으면 이백 원, 셋째 권을 다 읽으면 삼백 원을 준다는 기하급수적 꼬심에 혹해 책 읽는 데 취미를 붙이게 되었고 어느 순간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책 읽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걸 계기로 학교에서 '재밌는 애'로 통하게 된 소년은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인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고백 역시 작가가 아니면 하기 힘든 에피소드다.
그런데 정말 작가는 다르구나 하고 느낀 건 헤세의 『데미안』에서였다. 데미안 하면 떠오른 건 아브락삭스나 '새는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같은 대목이다. 그런데 오세혁 작가는 "전쟁터에 온 병사들은 돌격할 때 모두가 같은 얼굴로 달려가지만, 죽어 가는 순간에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로 죽어간다."라는 대목이었다. 이는 J.J 에이브럼스가 TED에 나와 영화 《죠스》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상어 나오는 데가 아니라 경찰서장이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정을 나누는 시퀀스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다.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작품을 자신의 시각으로 다시 보는 사람만이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오세혁 작가는 우리 동네에 산다. SBS에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만들었던 이동원 PD가 "당신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작가가 성북동에 산다"라면서 소개해 줘서 경신중학교 언덕에 있는 치킨쌀롱에서 만나 맥주를 마셨는데 말이 무척 많고 빠르고 목소리가 컸다. 그가 얼마나 말이 많은지는 이 책에도 나와 있다. 어느 날 대본 쓰는 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갈등 때문인지 숨이 안 쉬어지는 걸 느낀 오세혁이 신경정신과에 가서 숨이 안 쉬어진다고 호소를 했더니 의사가 삼십 분 정도 계속 말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기회는 이 때다 하고 그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했다. 연습하고 있는 공연 얘기도 하고 연극과 뮤지컬의 공통점과 다른 점도 얘기했다. 자신이 왜 공연을 하게 되었는지, 외동으로 태어나 얼마나 외로웠는지, 그 외로움을 이기 위해 보게 된 책과 노래와 영화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공연으로 시작해 인생이라는 거대담론으로 삼십 분 대장정의 막을 내렸더니 숨이 쉬어지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 병원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가 거길 이제 갔냐, 나는 그 병원 다닌 지 일 년도 넘었다, 하면서 쉬지 않고 삼십 분간 또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나 참. 이러니 내가 오세혁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재밌고 웃기기만 하는 건 아니다. 무뚝뚝했던 아버지가 고3이 된 아들에게 '수험생은 잘 먹어야 한다'면서 거의 반년 간 둘이 앉아 말없이 설렁탕만 먹는 장면은 참으로 애잔하고도 감동적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연하의 남자를 만나 재혼할 때 결혼식 장면은 또 어떤가. 글 퀄리티에 비해 삽화가 좀 유치하고 편집도 아쉬운 점이 있지만 오세혁 작가의 글은 하나하나 다 맛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