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고소하고 우아한 테이블》
2015년 연희동의 시장 안에 있던 '경성참기름집'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한 신승연 대표는 안타까운 마음에 1983년부터 영업을 해오던 그 기름집을 덜컥 인수해 버립니다. 참기름에 대한 소소한 애정 덕분에 팔자에 없는 기름장수가 된 거죠. 어제는 아내 윤혜자와 함께 연희동에 있는 '에스깔리에'에 갔습니다. 경성참기름집의 신승연 대표와 르모듈러 권희숙 대표가 손잡고 마련한 들기름 팝업에 아내가 모더레이터로 초청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운영하는 독서클럽 '독하다 토요일'의 멤버인 박효성 씨가 다리를 놔주었다고 합니다(효성 씨도 일요일 팝업의 모더레이터로 참가합니다). 저는 초대받지 못했는데 아내가 '껌딱지 남편'이 하나 있다고 부탁을 해서 묻어갈 수 있었습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엔 권희숙 대표가 수입한 프랑스의 테이블 웨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팝업 제목과 순서, 메뉴 등이 적힌 시트가 접혀 있었습니다. 여기는 '프렌치 모던 디자인 갤러리'를 표방하는 곳이거든요. 입구 쪽 테이블엔 요리 관련 책과 함께 아내의 책 <부부가 둘 다 잘 먹었습니다>와 저의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가 놓여 있었습니다. 권희숙 대표가 세심하게 준비해 주신 거죠. 행사를 준비하는 내공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행사가 시작되어 신승연 대표가 '경성참기름집'이라는 브랜드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고 권희숙 대표도 신 대표와 함께 이 공간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된 마음가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신 대표는 참기름이 아닌 '들기름 팝업'을 하게 된 이유를 "사람들에게 맛있던 기억을 나눠주고 싶어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참기름은 많이 먹고 쓰지만 들기름은 좀 생소해하는 이유가 '맛있었던 기억이 없어서'가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러면서 그는 들기름엔 오메가3도 많이 들어 있어서 서양에서도 각광받는 중이라는 멘트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모더레이터 윤혜자는 자신이 김장할 때 수육 삶는 얘기부터 했습니다. 수육을 삶을 때 간장과 들기름을 섞으면 올리브유와 발사믹을 섞는 효과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기름의 우아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이 행사에 왜 우아함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생각해 보니 여기에는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 외에 당당함이 숨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없을 때는 빈자리가 커 보이지만 막상 있을 때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 가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들기름이라는 식재료를 바라보니 거기에 그런 속성이 숨어 있더라는 것이죠. 강렬하지는 않지만 우아하게 식욕을 돋우고 다른 식재료에 힘을 넣어주는 존재가 바로 들기름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시식 시간엔 들기름으로 구운 두부구이와 파스타, 당근 샐러드, 크림스튜, 통들깨 묵은지 김밥 등이 나왔는데 하나 같이 그 맛과 품위가 대단했습니다. 코스로 나온 요리는 모두 신승연 대표의 오랜 친구인 제주도 '문우'의 이명희 대표와 '차차키친'의 차정은 대표가 준비했는데 참가자들의 연이은 경탄에 '집에서 친구들과 해 먹는 요리 수준에 불과하다'라고 겸손을 떨어 무슨 소리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바게트는 해방촌의 '오파토'가 좋다고 하길래 그것도 노트에 적어 놓았습니다. 나중에 아내와 브런치 먹으러 한 번 가려고요. 차정은 대표는 원래 성악 전공(소프라노)인데 제주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레이지 댄싱 써클'의 크래프트 막걸리를 가져온 림보이의 임상완·김수연 대표도 만났습니다. 림보이는 르모듈러, 경성참기름집과 함께 이 행사를 공동주최한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행사가 끝나고 정수연 유리작가와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음식은 아내가 해주는 대로 먹기만 하는 주제에 너무 좋은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에스깔리에에 모여 좋은 음식과 대화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즐기는 많은 문화 중에서 가장 손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접근성과 보편성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장르가 '먹는 것'이라서 이런 행사와 방법론에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 게 아닐까 하고요. 얼른 생각해 봐도 밥은 누구나 하루에 두 번 또는 세 번은 먹지만 책을 하루에 두세 번 읽기는 힘들잖아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매일 여행을 하긴 힘들고요.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좋은 일 중 하나가 '집에서 다시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라는 것이라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기왕 먹을 거라면 좀 더 맛있게, 품위 있게 먹는 데 관심과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신승연 대표와 권희숙 대표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