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보내온 사진을 보며 든 생각
집을 고치다 보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남이 지어놓은 집을 사거나 전세로 들어가지 않고 왜 굳이 헌 집을 사서 고치는 거냐, 같은 존재론적 고민이야 기본이고 공사가 진행되면서 날마다 실시간으로 챙겨야 하는 자잘한 요소들이 끊임없이 생긴다. 꼼꼼한 데다가 기획력도 있는 아내와 사는 덕분에 나는 거저먹는 것과 마찬가지라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길인데 나라고 가만히 앉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일단 모든 일에 돈 걱정이 따라붙는다. 돈은 늘 모자라기 마련인데 일을 벌여놓고 보면 공사비 말고도 자잘하게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 못한다. 예를 들면 이사 비용 같은 것들이다. 작년에 서울에서 보령으로 이사 올 때는 정말 이사 비용이 컸다. 이번엔 같은 동네로 옮기는 거라 그때보다야 적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사가 한 달 남은 시점에 아내가 이삿짐센터 두 곳에 연락을 해 견적을 받고자 청했다. 그제 한 분이 홍성에서 오셨는데 설명하는 자세가 믿음이 가고 합리적이라서 다르 분께는 오지 말라고 하고 그분으로 정해버렸다. 이사 가는 곳이 가까운 곳이니까 급한 것들은 내가 미리 야금차금 차로 실어다 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게차를 써야 하는 등 기본적으로 드는 건 똑같다.
이사 가기 전 먼저 해결해 놓아야 할 가장 큰 프로젝트는 에어컨이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날 수 없으니 그만큼 미리 신경을 써야 한다. 문제는 이맘때부터 어에컨 기사들이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설치 스케줄 잡는 게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 에어컨은 현재 명천동에 두 대가 있다. 하나는 마루, 하나는 안방에 있는데 인버터 에어컨이라 성능도 좋고 전기료도 적게 나온다. 새로 이사 가는 대천동 집엔 원래 침실과 거실 두 대면 충분했지만 뒤란에 내 집필실을 이층으로 증축하는 바람에(1층은 필로티 구조) 두 대의 에어컨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LG에 다니는 지인 덕분에 에어컨은 좀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작년에 명천동에서 살 때도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몇 주 전 새 집 공사 현장에 와서 에어컨 설치 계획을 세우고 간 어에컨 기사님이 너무 바빠 틈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에어컨은 도착 날짜가 정해졌는데 그 기사님이 안 나타나면 모든 스케줄이 꼬여버린다. 아내는 며칠 동안 전주에서 활동하는 기사님에게 전화도 걸고 문자메시지도 보내고 하며 애를 써보았으니 결국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날 못 오시면 우린 어떡해요?"라고 했더니 "할 수 없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아내가 한숨을 쉬며 분노했다.
그날 저녁 기적이 일어났다. 기사님이 아침에 일찍 올 수 있다고 다시 연락을 해온 것이다. 우라는 환호성을 질렀다. 고맙습니다!! 대신 아침 일찍 가야 한다고 하길래 얼마든지 일찍 오시라고, 새벽에 오셔도 된다고 말했다. 마침 우리는 이날 오후 군산에 있는 고영주 대표의 젤라또 팝업 '노베오(Noveo)'에서 다른 분들과 만날 약속이 있고 또 오전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사님이 일찍 와준다면 우리도 좋은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우리는 단골인 '햇살머문꼬마김밥'에 전화를 해서 꼬마김밥 세 줄과 어묵 한 그릇을 주문했다. 보나 마나 기사님은 새벽 일찍 일어나 쫄쫄 굶고 올 게 뻔하니까 우리가 먼저 먹고 기사님이 오시면 일 인분을 드시게 할 요량이었다.
우리가 김밥을 우걱우걱 먹고 있는데 기사님이 7시 좀 넘어 문을 두드렸다(그러고 보니 여긴 인터폰이나 초인종도 없이 지냈다). 우리가 김밥을 좀 드시고 하시라 했으나 기사님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김밥은 쳐다보지도 않고 에어컨 있는 데로 달려들었다. 마음이 급한 것이다. 비가 오기 전에 에어컨과 실외기를 현장으로 옮기기로 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나도 대충 설거지를 하고 아내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했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테랑 기사님의 손은 빨랐다. 현장을 지키고 있던 임 목수님과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사님은 재빠르게 에어컨과 실외기를 설치할 장소를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작업이 들어갔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창밖 데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두들겼다. 이층 내 작업실은 언제 올라와도 기분이 좋고 설렌다. 아내와 나는 목수님과 기사님을 믿고 먼저 가겠다고 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서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지만 바쁜 일정이 아니니 큰 걱정은 없었다. 군산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기사님에게서 에어컨 설치 작업 사진들이 도착했다. 사진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엔 "층계 앞 에어컨을 달다가 작은 기스(일본어 ‘キズ(kizu)’에서 유래된 말로, 흠집이나 상처를 뜻한다)가 났는데요..."라는 걱정의 글이 담겨 있었다. 흠집이 났다는 말에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작은 흠집이었다. 우리는 이 정도는 정말 괜찮다고, 수고하셨다고 답장을 했다.
"아이고, 뭐 이 정도 흠집을 얘길 하고 그러실까." 이런 얘기를 나누던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린 괜찮다고 했지만 고객 중엔 이런 작은 흠집 하나만으로도 불 같이 화를 내고 항의를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기사님이 이렇게 소심한 글을 보내온 게 아니겠냐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랬다. 얼마나 많이 당했으면 이 정도 흠집에도 저런 제스처가 되는 것일까. 살다 보면 곳곳에 함정이 숨어 있다. 혹시라도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건 아닐까 늘 돌아보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