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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2. 2019

여보세요, 저 아까 뒷자리에 앉아 울던 사람인데요

전 세계 25개 상 수상작 [벌새]

좋은 작품이란 무엇일까. 우선 '인간'이 들어 있어야 하고 '시대'까지 들어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지난 금요일에 본 영화 [벌새]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주인공 은희는 1994년 대치동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고 공부엔 별 관심이 없는 '조용한 날라리'다. 카메라는 은희와 그의 단짝 친구 지숙, 가부장적인 아빠와 오빠, 부모 몰래 연애하는 언니,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봐 준 한문학원 선생 영지 등을  차례차례 등장시키면서 평범한 사춘기 소녀의 성장담이 1994년의 대한민국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사실 나는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도 모르고 갔을 정도로 별 기대감이 없었다. 우리 부부와 친하게 지내는 연기파 배우 이승연(스튜어디스 출신의 그 이승연 말고) 배우가 나오기 때문에 보자고 한 것이었는데 개봉하기도 전에 전 세계에서 25개의 상을 탔다는 얘길 듣고는 도대체 무슨 영화길래, 라고 궁금해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런데 일단 주연을 맡은 박지후의 연기와 마스크가 똑소리 나게 좋았고 한문선생 역의 김새벽의 카리스마도 발군이었다. 몇몇 장면은 정말 짜릿하게 좋았는데 자신을 업신여긴 남자친구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어찌할 줄 몰라하다가 텅 빈 거실에 들어와 트로트 버전의 '여러분'을 틀어놓고 휘청휘청 춤을 추는 씬은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후련했고 모종의 사건 후 사이가 틀어져 씩씩대고 있는 은희와 지숙을 본 한문선생이 두 아이를 아주 한참 바라보다가 "노래나 하나 불러줄까요?" 하고는 나지막이 , 운동권 가요를 불러주는 장면도 가슴이 아린 순간이었다. 서울대를 다니다가 운동권 학생이 되어 휴학을 거듭하고 겨우 학원 한문선생이나 하고 있는 영지가 중학교 제자들에게 어줍잖은 충고 대신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진심을 노래라는 수단을 통해 가까스로 전하려 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딸에게 감자전을 부쳐주고는 아귀아귀 그걸 먹는 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승연의 연기도 눈물겨웠다.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란다. 너무 작아서 1초당 80번 이상 날개짓을 한다는데 영화 [벌새]도 이름처럼 작은 영화다. 그러나 이 작은 영화엔 정말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어중간한 나이인 중학생들에게 가부장적인 가정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고 그 또래에 유행하던 레즈비언 감성도 괴이하지 않게 그려낸다.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참사가 들어 있다. 많은 영화나 소설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그저 배경으로만 소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소설과 이 영화처럼 당대의 사건 속으로 깊게 들어가는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우리 커플은 영화관 뒷자리에 앉아서 훌쩍훌쩍 울었다. 슬픈 내용만 있는 영화가 아닌데도 자꾸 울었다. 앞에서 얘기한 인상적인 장면들에서 운 것은 물론이고 영지가 담배를 피우며 그래도 손가락 열 개는 다 움직일 수 있어, 라고 말할 때도 울었고 은희가 거실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엄마가 깨트렸던 스탠드 전구 조각을 소파 밑에서 효자손으로 찾아냈을 때도 울었다. 늘 그렇지만 잘 쓴 시나리오에는 이렇게 곳곳에 눈물샘을 터뜨리는 지뢰들이 매설되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 후드]가 생각난다고 했다는데,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1994년도 대한민국의 '보이후드'다. '근데 조금 줄였으면 했어.특히 뒤를.아직 좀 더 다듬어야 할 원석이야...' 라는 오동진 기자의 댓글을 페이스북에서 방금 우연히 읽었다. 그분의 말대로 조금 긴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난 지금 이대로도 참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나와 1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우리와 같이 영화를 보고 나온 젊은 여성 관객 둘이 1층까지 내려가면서 "난 솔~직히 이 영화를 왜 그렇게 극찬하는지 잘 모르겠어." "뒤에 앉은 사람들은 막 울기도 하고 그러던데, 웃을 때도 왜 웃는지 잘 모르겠고...이것도 세대 차인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가는 그 친구들을 붙잡아 놓고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여보세요, 저 아까 뒤에 앉아 울던 사람인데요. 아니, 이 영화가 왜 좋은지 모르겠다뇨? 이렇게 끝내주는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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