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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1. 2019

금주일기 7

<일산에서 세 번째 음주티켓을 쓴 날> 편



어제 열린 '서민 교수의 서늘한 독서'라는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사실은 그 행사 뒤 열릴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일산에 있는 가좌도서관에 늦게 도착했다. 이 정도로 지각을 했으면 이젠 강의가 거의 끝났겠지 생각하고 시청각자료실로 들어갔으나 아직도 한창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사이비교 광신도들처럼 서민 교수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객석 뒤쪽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김병민 작가의 모습도 보였다. 강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작가 싸인을 받는 동안 나도 책을 한 권 골라서 줄을 섰다.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이라는 부제가 붙은 [밥보다 일기]라는 책이었다. 내가 우리 부부의 이름을 쓴 냅킨을 보여주며 "아내 이름을 먼저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서민 교수는 표지 안쪽에다 기생충의 모습을 먼저 그리고 그 안에 날짜를 써넣은 뒤 "윤혜자 님 그리고 편성준 님 두 분의 합동 자서전 기대할게요'라는 글을 써주었다. 강의 중에도 자서전에 대한 얘기를 좀 하긴 했지만 어쨌든 아내와 함께 자서전을 쓰는 건 흥미로운 아이디어인 것 같았다. 다만 공처가인 나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쓸 것이 틀림없으므로 책을 다 쓰고 나면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바르고 착하며 정의로운 인격체로 그려지는 반면 나는 그런 아내를 한없이 바라보며 식량만 축내는 빙충이로 나올까 봐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자서전은 좀 뒤로 미루고 일단 '성북동소행성'을 컨셉으로 한 이야기를 먼저 써보아야겠다.


강의가 끝나고 숯불로 삼겹살을 구워주는 고깃집으로 가서 부어라 마셔라 즐겁게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백승권 대표와 서민 교수, 이정모 관장과 석 달 전에 만나 술을 마시면서 이 날을 미리 예약해 놓았던 것이었고 11월 말까지 금주 중인 우리 부부는 총 세 장이 있는 '음주 티켓'을 이 날 한 장 쓰기로 했던 것이다. 모처럼 음주 티켓을 쓰는 날이므로 술 마시고 노는 데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선화 관장과 윤현숙 상무, 김정진 작가는 모두 고기를 굽는 데는 젬병이어서(뭐든 잘 못하는 나 역시 고기를 잘 못 굽는다. 평소에도 내가 고기를 구우면 늘 옆에서 누군가 한숨을 내쉬며 집개를 빼앗아가곤 한다) 고기가 타고 눌어붙고 했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맥에 소주에 맥주를 연거푸 따라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

2차로 간 벨라시타의 야외 맥주집에서는 동네에 사는 양희문 성우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막내 필사였던 장훈 작가까지 합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양희문 성우는 거의 모든 성우들이 그렇듯이 말할 때마다 자체 내장 스피커가 들어있는 것처럼 멋진 음성이 흘러나와 위화감을 조성했다. 상대적으로 졸렬한 목소리를 가진 나와 서민 교수 같은 사람들이 의문의 일패를 당해야 했다. 장훈 작가가 쓴 [어쩌다 공무원 어쩌다 글쓰기]라는 책을 한 권씩 선물로 받고 기쁘게 기념촬영도 했다. 3차로 어딘가 또 가자고 일어날 때 우리 부부는 집으로 가는 전철역으로 향했다. 마음은 굴뚝이지만 집이 너무 멀어서 먼저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장훈 작가의 글을 좀 읽었다. 요란하지 않은 차분한 글들인데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 글을 쓰게 된 계기, 좋아하는 이상문학상의 단편 작품들, 살면서 잘한 일 등등 자신의 삶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정감 있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나보다 먼저 책을 들춰본 아내도 나와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안국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오면서 그래도 티켓을 쓰는 날인데 여기서 술을 멈추는 건 좀 아깝지 않으냐고 하면서 좀 고민을 했다. 동네 술집을 또 찾아가기엔 둘 다 몸이 너무 지쳤고 그냥 가기엔 아쉬웠다. 결국 김밥을 두 줄 사고 수퍼에서 소주를 두 병 사 가지고 집으로 올라왔다. 우리 부부는 밥 안주로도 소주를 곧잘 마신다. 뭔가 볶음 요리를 시켜먹고 나중에 그 양념에 볶음밥을 만들면 그 밥에 소주 한 병을 너끈히 비우는 식이었다. 물론 김밥이 볶음밥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안주 노릇은 하는 편이었다. 나중에 김밥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아내가 계란 다섯 개를 풀어 계란말이를 해주었다. 우리는 새로운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를 보면서 술을 마셨다. 웹툰 원작이라는데 임시완을 비롯한 모든 출연자들이 다 연기를 잘해서 볼 만한 프로그램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술이 안 깨서 한참을 더 자리에 누워 있었다. 고양이 순자가 와서 배가 고프다고 치대길래 밥을 퍼다 주고 또 누웠다. 아내가 이제 11월 말까지 술은 끝이라고 말했다. 나는 역시 술은 몸에 안 좋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빨리 12월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야,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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