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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31. 2019

경희현한의원과 10번 할아버지

환자들의 지혜

요즘 오른쪽 어깨가 뻑뻑해 침을 맞으러 다니는 수유시장 안 경희현한의원은 언제나 만원이다. 동네에 사는 배우 김혜나가 추천해서 오게 된 병원인데 아침 일찍 와도 늘 사람들이 많길래 언제 와야 일찍 진료를 할 수 있느냐고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한의원 문은 아침 아홉 시에 여는데 새벽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이 와서 기다리신다고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오전 진료만 있는 날이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수유시장으로 왔다. 3층 계단을 올라가니 컴컴한 복도 한의원 앞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환자는 없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더니 할아버지가 웃으며 볼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기다리는 사람들끼리 순번을 써서 릴레이로 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10번이라고 하면서 종이 위에 11을 써서 나에게 주었다. 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다음 분이 오면 종이와 볼펜을 넘기라는 것이었다. 어디든 가 있다가 8시 반쯤 다시 오면 그때는 간호사가 나와 정리를 해줄 것이라고 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가 제일 먼저 이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우리는 흔히 노인들은 낡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근근이 여생을 보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위를 획득한 디지털 세대가 섣부른 지식을 뽐낼 때 노인들은 삶에 꼭 필요한 아날로그적 지혜를 건넬 줄 안다. 보다 공평하고 편하게 명의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자치회를 결성한 것이다. 나도 오 분쯤 기다리다가 어떤 할머니가 오시길래 12라고 종이에 써서 건네드리고 아침을 먹으러 시장 입구에 있는 부산아지매국밥집으로 가 밥을 먹었다. 행여나 하고 등산용 깔개를 챙겨 왔던 내가 부끄러웠다. 아침부터 남의 동네에 와서 똥을 두 번이나 누었다. 국밥집 화장실에서 여분의 휴지를 훔쳐놓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래저래 창피한 일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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