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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28. 2019

김탁환을 가려도 김탁환이 보이는 연애소설

가시리, 높고 고운 사랑노래

모든 작가들의 꿈 중 하나는 순도 높은 연애소설을 한 편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인간사가 복잡해 보여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끝나버리지만 그 속엔 어김없이 사랑과 연애사건이 하나씩 존재함으로써 그나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아니겠는가.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즈는 그것을 'The only story', 즉 단 하나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역사소설을 주로 쓴 김탁환도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높고 고운 노래[高麗歌謠]가 있던 시절, 제국에 저항하며 뜨거운 사랑을 키워가는 세 남녀의 이야기인 [가시리, 높고 고운 사랑노래]라는 소설을 썼는데, 초고를 한 달쯤 썼을 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엄청난 참극 앞에서 도저히 역사 로맨스 소설을 계속 써 내려갈 수 없었던 그는 [가시리] 집필을 중단하고, 세월호 참사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 봄부터 2017년 봄까지 [목격자들]과 [거짓말이다]와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와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를 잇달아 냈다. 결국 출간이 늦어진 [가시리]는 2017년 가을에나 세상에 나왔는데 '김탁환 이름 석자를 내걸고 연애소설을 출간하기엔 2017년 늦가을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작가 이름을 선유로 바꾸어 냈다고 한다. 소설을 구상할 때 많이 걸었던 선유도의 이름을 딴 필명인 것이다. 세월호, 메르스 등의 소재로 사회파 소설을 한창 펴내다가 연애소설을 함께 발표하기엔 시기적으로 적잖게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나 눈 밝은 독자들은 있는 법이어서 선유라는 필명에서도 김탁환을 읽어낸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 이야기를 노래극으로 만들어보려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자 결국 출판사가 작가의 실명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음악과 노래를 매우 사랑하는 작가 김탁환답게 [이토록 고고한 연예]가 조선시대에 춤추고 노래하던 광대 달문의 이야기라면 [가시리]는 '가시리' '청산별곡' 등 고려가요를 부르던 아청이라는 소녀와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며 운명적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좌와 우라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때는 몽고제국이 고려를 침공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던 시기였는데 특히 강화도와 진도와 제주도로 점점 물러나면서도 끈질기게 항쟁을 벌였던 삼별초의 행적이 이 사랑 이야기의 배경이다. 즉 [가시리]는 전쟁과 사랑이 겹치는 서사시이고 칼과 노래가 비극적으로 교차하는 드라마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좌가 제주도에서 성을 쌓고 한라산 가는 길 여기저기를 걸으며 작전을 구상할 땐 지난여름 김탁환 작가, 조영주 작가, 강보식 선생과 함께 걷던 제주도의 바람 언덕들이 생각나서 새삼 반가웠다.  

좌와 우는 몽고제국에 빌붙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조정 대신 '북'을 암살하는 작전에 자원해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3년이나 지하 감방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돌아오고 아청은 맑고 고운 노래로 몽고에 항전하는 삼별초  병사들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 좌와 우, 아청은 열아홉 살이 되어 다시 모여서도 함께 노래를 부르며 울고 웃다가 아청이 학처럼 두 팔을 벌려 좌와 우를 동시에 안는다. 그러나 어디 사람 사는 일이 뜻대로만 되던가. 현실주의자 우는 몽고의 편으로 돌아서고 좌는 그런 우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강화로 제주로 쫓겨간다. 적어도 그의 곁에는 아청이 있었으니까. 삼별초 대선단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아청의 모습을 묘사함 김탁환의 문장은 눈이 부시다.

"출항 이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가인이 있습니다. 선단의 후미까지 들리지 않지만, 중간 즈음까지 올라가면 충분히 들릴 만큼 소리가 큽니다. 바람을 맞아도 흩어지거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높고 짙고 따뜻합니다. 노래를 듣노라면 피로가 사라지고 힘이 납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멋지리란 기대감에 젖습니다. 한 뼘이라도 가까이에서 노래를 듣고자 악착같이 배의 속도를 높이려 합니다. 돛을 더 활짝 펴고 노를 더 자주 젓습니다. 노래가 이어지는 한, 선단은 점점 더 날쌔게 한 몸처럼 움직일 듯합니다. 천여 척이 바다에 떠 있다 보면 서너 척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낙오하거니 이탈하기 마련인데, 선봉을 향하지 않는 배가 한 척도 없습니다 충분히 훈련받은 정예 선단과도 같습니다. 부딪히지 않고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는 물고기 떼처럼 전후좌우 배들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가인에 대한 풍문이 배에서 배로, 파도에서 파도를 넘어 매일 넘실거립니다. 최선봉 군선 뱃머리에 서서 노래하는 가인의 이름은 아청입니다. 팔방상의 으뜸 가인 아청!"    

이 소설은 역사적 지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전쟁 이야기이다. 동시에 고려가요를 처음 접한 순간 그 간절함 아래 흐르는 짙은 슬픔에 마음 떨리던 기억 없이는 묘사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삶이 참혹할수록 노래는 더욱 빛난다고 했던가. 사랑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는 모두 사랑 노래라고 했던가.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이지만 그들이 만든 노래는 75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땅에 남아 누군가에게 계속 불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높고 고운 나라(高麗)에서 불리던 아름다운 노래(歌謠)들이 김탁환이라는 작가를 만나 다시 한번 안타까운 사랑노래로 태어나게 된 것도 예정된 운명 아니었을까. 사나웠던 더위가 물러간 자리에 [가시리]라는 어여쁘고 향기롭고 쓰라린 사랑 노래를 한 권씩 들여놓으시기 바란다. 증쇄 계획이 없는 이 책은 곧 절판됨으로써 많은 독자들의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희귀본'이 될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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