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선의 『잔소리 약국』
살다 보면 지인 중에서 이 사람은 꼭 책을 써야 해! 하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김혜선 작가 겸 기자 겸 저널리스트 겸 편집자 경 방송작가 겸 다큐 구성작가가 겸 연출자가 그런 사람이다. 웬 '겸'이 그렇게 많냐고?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프리미어》나 《필름 2.0》 기자 노릇을 했던 영화인이라 그렇긴 한데, 기자만 한 게 아니라 중간에 《출발! 비디오여행》이라는 TV 프로그램의 구성작가도 했고 영화 웹진도 만들다가 지금은 《베테랑》부터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한국 영화 블루레이와 DVD의 스페셜 메이킹 구성작가 겸 연출가로도 활동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직종이 나열된 것이다.
그런 사람이 평생 같은 장소의 약국에서 '약사' 로만 불리던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사람은 김혜선 작가의 엄마다. 1960년대 '이대 나온 여자'였던 엄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생 약국에서 약만 팔아온 사람인데 어느 날 약국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치는 바람에 둘째 딸에게 출퇴근을 의지하게 된다. 둘째만 결혼을 안 했고 회사도 안 다니기 때문(?)에 같이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잔소리 약국'이라는 제목은 2년 11개월 간 엄마와 살면서 김혜선이 들은 엄마의 불평불만과 그 속에서 벌어졌던 '51년 차 약사 엄마와 17년 차 프리랜서 딸의 티키티카'를 상징하는 단어다.
약국을 시작한 지 50년째 되는 날 좀 쉬라는 딸의 성화에 엄마는 "내가 약국을 안 하면 뭘 하지? 나는 무슨 쓸모가 있지?"라고 말한다. 그렇다. 엄마는 약국을 해야 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고 엄마가 사는 재미를 느껴야 딸도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딸은 25년을 일해도 통장 잔고는 바닥일 때가 많다. 결혼 안 한 둘째 딸로서 온갖 집안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다 보니 계좌는 자주 텅텅 빈다. 그렇다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영화 관련 프리랜서로 일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엄마는 "너 요즘 하는 일이 뭐야?"라고 묻곤 한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아침저녁 엄마를 출퇴근시키느라 괴로운 딸은 일요일은 교회 가서 엄마 친구들에게 질문 세례(결혼은 왜 안 했냐? 난자는 냉동했냐?)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 점심을 안 먹고 도망치기 일쑤다.
책에는 이런 엄마와 딸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영화 매체에서 글을 쓴 작가의 필력은 약국에서 엄마가 파는 약들을 일별힐 때도 빛난다. 어렸을 때부터 마시면 몽롱해진던 '박카스'에서는 고단한 노동자와 샐러리맨들의 비애를 읽어내고 경쟁 관계에 있는 까스명수와 까스활명수를 바라보며 너희들이 바로 '마시는 소화제 유니버스'의 마블과 DC,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네이버와 카카오로구나, 라는 메타포의 향연을 날리기도 한다(유미주의자인 김 작가는 맛으로만 치면 '노루모액'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
영화 <애프터썬>을 보며 공무원이었다가 퇴직 후 사기를 당해 외국에서 형무소 생활까지 했던 '셔터맨' 아버지 생각을 하는 슬픈(?) 장면도 있지만 그래도 이 책에서 정말 재밌는 건 엄마와의 끊임없는 '티키티카'다. 나는 특히 김 작가가 엄마와 있으면서 할 수 없이 보게 된 일일드라마 <내 눈에 콩깍지> <우당탕탕 패밀리> <수지맞은 우리> 등이 내가 단골 식당에 저녁 먹으러 가면 보이던 드라마 제목들과 일치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저녁 8시 30분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아무 때나 봐도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고 볼 때마다 '클라이막스'라는 점인 것 같다.
2024년 1월에 성북동에서 출판평론가 김성신 선생이 주최한 최용대·김춘수 시집 『꿈인 듯 눈물인 듯』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우리 집에 와서 차를 마시며 즉석에서 이 책을 기획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도 우린 김혜선 작가에게 어서 책을 쓰라고 채근했고 나는 장난스럽게 책 제목으로 '엄마, 약 좀 그만 팔아!'가 어떠냐고 했는데, 책을 사서 열어보니 3부 '작용과 부작용'(반작용이 아니고 부작용이라 쓴 유머감각을 보라!) 맨 마지막 꼭지 제목으로 쓰여서 기뻤다.
약사 엄마는 돌아가시며 약국을 남겼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본인은 모르는 더 소중한 가치를 남겼으니 그게 바로 둘째 딸의 데뷔작 『잔소리 약국』이다. 이게 오토픽션인지 에세이인지 소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필력 좋은 프리랜서 작가는 잔소리 심한 엄마를 만나 맛깔 난 솜씨로 그 이야기들을 버무려 놓았을 뿐이고 나는 그걸 읽고 이 작가에게 감탄했을 뿐이다. 일독을 권한다. 벌써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