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 있는 '인정식당'에서 있었던 일
전날 서울에서 내려와 우리와 함께 김장을 한 남경 씨 철기 씨 부부와 아침에 다시 만나 인정식당에 갔다. 여기는 새벽 4시 반부터 음식을 내주는 아침 식당인데 세련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시골집에 놀러 가면 나는 꿈꿈한 밥 냄새 국 냄새가 풀풀 나는 곳이다. 외양간 냄새가 안 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우리는 주방에 계신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메뉴를 골랐다. 나는 미역국을 골랐고 남경 씨는 아욱국을 선택했다. 아내는 김칫국을 외쳤고 철기 씨는 남경 씨의 명령에 의해 콩나물국을 먹게 되었다. "이거, 메뉴가 다 달라서 어떡해요?"라고 하니 할머니는 "괜찮아요."라며 여유 있게 웃으셨다. 보통은 주문이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계란말이를 부치기 시작하는데 오늘은 안 계셨다.
동그란 쟁반에 들려 나온 반찬들을 보며 남경 씨 부부 눈이 휘둥그레졌다. 볶음김치에 깍두기, 무채나물, 콩나물무침, 덴뿌라무침. 파김치, 시금치나물, 멸치볶음 한가운데엔 이 집의 명물인 계란말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젯밤 김장을 하고 수육과 회 안주로 조니워커 블루(또 다른 김장 멤버인 윤진 씨 남편께서 보내주심)와 안동소주(남경 씨 부부가 가져오심)를 마신 뒤였으므로 해장이 절실했다. 수육은 아내가 대천중앙시장에서 돼지고기를 사 와 삶았고 회는 여성 멤버들이 김치속을 넣은 동안 나와 철기 씨가 대천항 수산시장의 우성수산에 가서 떠 온 것이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중간에 출근하신 할아버지가 새로 부친 계란말이를 할머니가 기존의 계란말이 접시 위에 쏟아 놓고 가셨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습격이었지만 우리는 어린이들처럼 기뻐하며 따뜻한 계란말이를 입에 욱여넣었다. 만족스러운 아침밥이었다. 철기 씨가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르 갔더니 "현금 이체를 하면 더 고맙쥬."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철기 씨가 "이체했습니다. 농협 안 XX님 맞으시죠?"라며 들어왔나 확인해 보시라고 하니 할머니는 "아유, 안 봐두 돼유. 안 들어오면 말지 뭐."라고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오죽하면 안 들어오겠어." 아아, 오죽하면 안 들어오겠느냐는 할머니의 말씀에 우리는 기이한 감동을 느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고생스럽게 장사를 하시는 이 분들의 마음이 이렇구나. 여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우리의 정확한 거래와 셈법은 언제나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던가.
식당을 나와 남경 씨 부부는 곧장 서울로 향했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김장 뒤처리 청소를 해야 했고 나는 오후 2시에 대전에 있는 노숙인지원센터에서 인문학 강연을 해야 했으므로 자동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다. 김장하는 장소를 우리 집으로 정하면 할 일도 많고 재료 준비도 힘들지만 그래도 하고 나면 뿌듯하다며 아내는 내년에도 김장을 할 뜻을 비쳤다. 무엇보다 지금의 김장 멤버가 참 좋다. 우리 집에 모여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얼굴 한 번 붉히는 일 없이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인정식당 같은 촌스러운 식당에 가서 밥을 맛있게 먹고 헤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김치는 핑계고 진짜는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