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Dec 04. 2019

제주에서 아내 없이 혼자 보낸 두 번째 허니문

아내 없이 제주에서 한 달 살기 25

예전에 가수 진미령이 개그맨 전유성과 살다가 헤어지기로 했던 순간에 대해 방송에 나와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전유성이 냉면을 먹자고 해서 각자 다른 곳에 있던 두 사람이 냉면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보니 전유성이 조금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자기는 이미 냉면을 먹었으니 진미령더러 알아서 냉면을 먹고 가라고 하고는 먼저 일어서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 사람과는 더 이상 같이 살 이유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굳히고 그대로 이혼을 감행했다고 한다. 전유성이 특별히 나빴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때 이미 그들에겐 서로를 붙잡아 둘 사랑의 향기가 다 날아간 상태였다는 게 슬플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김세희의 등단작이라는 <얕은 잠>을 읽는데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6 년 간 같이 살고 있는 남자 정운과 함께 남쪽 바다로 여행을 온 미려는 정운의 제안에 따라 서핑을 배운다. 그런데 수영을 못하는 미려는 운동을 잘하는 정운과 떨어져 서핑을 배우게 되고 그때부터 불안감을 느낀다. 급기야 보드 위에서 쉬다가 잠깐 '얕은 잠'이 들어 그대로 떠내려 가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 되는데 미려는 자기가 원래 있던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 좌표가 될 만한 건물이나 지형 대신 버릇처럼 정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탓이었다. 할 수 없이 다리에 매단 서핑 보드를 떼어내고 처음 보는 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해 원래 있던 곳으로 가긴 했는데 정운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호텔로 먼저 가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미려는 정운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이 열릴 것을 직감한다. 그녀를 픽업트럭에 태워줬던 남자는 영문도 모른 채 "잘은 모르지만 굉장한 서핑을 한 것 같네요."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과 지내는 숙소로 그녀를 데려가는데
거기엔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카드 게임을 하고 있고 눈이 큰 어린아이 둘도 어른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겠느냐는 권유에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은 미려는 처음 보는 거실을 가로지르며 자신이 매우 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란다.

좋은 단편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지난여름 서핑을 잠깐 배워본 경험이 있어서 파도타기에 대한 묘사들이 나오는 것도 반가웠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막 들어서는 듯한 장면의 묘사가 싱그러웠다. [가만한 나날]이라는 소설집에 들어 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다가 농협 지점 ATM기에 들어가 현금을 좀 찾고 빨간 벽돌집 커피샵인 '93BREW'에 가서 커피를 샀다. 어떤 커피를 드릴까요 하고 묻길래 그냥 바디감이 좀 있는 걸로 주세요,라고 했더니 "아, 그럼 어떤 게 좋을까요..."하고 사장님이 너무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주세요, 저 그렇게 커피 잘 아는 사람 아니에요,라고 하며 오늘은 머핀도 하나 달라고 했다. 머핀은 뭘로 드릴까요,라고 묻길래 커피와 잘 어울리는 걸로 주세요, 라는 하나마나한 대답을 했다. 결국 아메리카노와 '한라산 머핀'을 받았다. 저 내일 올라가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라고 하니 두 분이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화들짝 놀라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뭔가를 꺼내왔다. 선물로 가게 이름이 새겨진 머그잔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자주 오지도 않았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했지만 선물을 주려는 사장님 부부의 의지는 완강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나중에 꼭 포스팅할게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너무나 좋아하며 또 인사를 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선량한 사람들을 보면 나는 이상하게 좀 서러워진다.

집으로 들어와 아내와 통화를 했다. 짐을 싸고 있느냐고 묻길래  저녁에 쌀 거리고 했더니 "집에 오기가 싫은 모양이군." 이라며 놀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은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심란하고 복잡한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좀 마음이 나아질까 고민하다가 어깨가 아픈 얘기를 써보기로 했다. 요즘 계속해서 어깨가 아픈 이유가 다른 데 아프지 않도록 어깨가 신경 써서 한 일이라는, 좀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내 어깨를 두드려 준 어깨>  
- 제주도를 떠나며

어깨가 결린 지 여러 날째다

서울에 있을 때
침도 맞고
플랭크도 했는데
여전히 결린다

지난달 렌터카에서  
뒷좌석 가방을 집다가  
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 하고 아내가 놀랐다

왜 어깨가 아플까
다른 데
아프지 말라고 아픈 거다

머리 아플 일 쌔고
가슴 아플 일 쌨으니  
여기 있는 동안은
안 아프라고  

어깨가 내 어깨를
두드려준 것이다

서울 올라가면  
정형외과 가면
어깨가 나으면

어깨만 괜찮아지고
인생에 다른
깡패가 나타나는 걸까
어깨야, 나 어떻게 할까  

어느덧 한 달이 꿈처럼 흘러가고 내일은 서울로 간다. 허니문에 대한 고전적인 유머가 생각났다. 이발을 하면 딱 하루 행복하고, 운전을 배우면 딱 일주일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딱 한 달 행복하기 때문에  '허니문'이라 부른다는 것이었다. 기껏 새 별장을 지어놓고 가족들이 입주도 하기 전에 나 같은 백수에게 먼저 한 달 살아보라고 집을 내주신 주인장 덕분에 고맙게도 나 혼자 온전히 꿀 같은 한 달을 지냈다. 이게 웬 인복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다 보니 이건 아내 덕분에 '아내 없이 제주에서 보낸 두 번째 허니문'이었다. 내일 서울 가서 아내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별로 안 좋았다고,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적당히 대답을 잘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어깨를 두드려 준 어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