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도시형 한옥에서 살기 일주일째

by 편성준

내가 외박에 재미를 붙인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술·담배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간 뒤부터인데 고등학교 때는 그런 거 없이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낄낄대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함께 밤을 지새운 친구들일수록 금세 친해졌고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에 우리들은 서로의 집을 번갈아 다니며 뒤엉켜 놀고 잤다. 게다가 나는 외박이 체질적으로 잘 맞아서 그런지 남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왠지 마음이 뿌듯하고 몸도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래도 제일 인기 있는 집은 우리 집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일 학년 이 학기쯤부터는 본격적으로 우리 집에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뚜라미든 영문과든 내가 아는 얼굴들은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밤늦게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와서 또 술을 마시고 기타를 치며 놀았다. 힘이 남아돌던 시절이라 우리는 한밤중에도 김현식이나 들국화 같은 시끄러운 곡들을 연주하며 놀았는데 당시 우리 식구들은 물론 이웃들도 그런 소음공해에 대에서는 참 무던한 편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냐? 현관 앞에 있는 신발 수를 세는 것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현관에 있는 신발을 센 뒤 그걸 딱 반으로 나눠 인원수만큼 밥을 해놓고 출근을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게으르게 일어나 아침을 차려먹고 트림을 꺼억하고는 또 자거나 수업을 받으러 전철을 타고 학교로 갔다. 설거지는 꼭 나 혼자 했는데 그건 밥을 차려주는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어머니는 평생 직장을 다니며 생활비를 벌면서도 퇴근 후에는 집에 와서 살림을 하는 고된 생활을 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내 친구들이 와서 놀거나 자는 걸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모름지기 집이란 사람들이 많이 놀러 와야 하는 곳'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처음 살림을 합치면서도 이런 철학은 이어졌다. 다행히 아내도 집에 사람들이 놀러 오는 걸 좋아했고 그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는 걸 즐겼다. 집으로 놀러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내 목표는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집까지 기어가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성수동의 아파트로 들어갈 때 거실 소파를 포기하고 함께 모여 술 마시기 좋은 긴 테이블과 의자를 샀다. 사람들은 TV 없는 거실에 와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놀다가 취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성북동에 있는 개인주택을 수리해 들어온 뒤부터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성북동은 대학로와도 인접해서 그런지 유난히 연극이나 영화 등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꺼이 '성북동小幸星'이라 이름 붙인 언덕 꼭대기 우리 집으로 와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높은 곳에 있는 집이라 멀리 남산타워부터 광화문빌딩, 서울의 성곽길 등 야경이 볼 만해서 사월부터 가을까지는 옥상파티가 인기였다. 우리는 핑계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모여서 고기를 굽고 전을 부치고 술잔을 따르며 도끼자루 부식에 힘썼다.


그렇게 이 년 정도를 보내고 나니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손님을 초대하면 적어도 십만 원 정도의 금액이 우습게 깨지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내가 회사 일로 너무 바빠 시간을 잘 못 내는 점도 요인이었다. 그리고 우리 커플에 비해 손님들의 체력이 너무 좋았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아내나 나와 달리 비교적 늦은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예술가들은 새벽 한 시쯤이면 눈이 반짝반짝해지고 술잔을 들어 올리는 손목에도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새벽 두 시에 하는 설거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멤버들에게도 일이 생겨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우리 집에 자주 오던 대학로의 스타 박호산 같은 경우는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나 <나의 아저씨> 등 TV 드라마들이 빅히트하는 바람에 예전보다는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 되었고 다른 친구들도 이런저런 이슈가 때문에 연락을 못하고 지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회사 생활에 지쳐 염증을 느끼는 사이 아내도 성북동 언덕의 계단을 오르는 일에 지쳐갔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제 우리도 밑으로 좀 내려가 살면 좋겠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내가 느닷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시점에 마침맞게 약간의 돈이 생겼다.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돈이긴 하지만 나는 수입이 막연하던 차에 생활비가 생겨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그 돈을 믿고 덜컥 아랫동네에 있는 한옥을 계약해 버린 것이었다. 졸지에 한옥을 갖게 된 우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차, 일단 우리 집부터 팔아야지" 하고는 언덕 위의 집을 부동산 중개소에 내놨는데 부동산 중개 싸이트에 올린 지 네 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계약이 성사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SNS에서 '성북동 소행성'이라는 이름이 나름 브랜딩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어 있는 한옥을 계약한 우리는 집주인의 호의 덕분에 계약금만 내고 입주 전에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는 특혜를 누렸다. 언덕 위의 집을 수리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임정희 목수님이 두 달간의 한옥 수리를 총지휘했다. 원래 한옥 전문 목수였던 임 목수님은 한옥의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고 하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 공사에 임했다. 공사를 하면서 몇 가지 행운도 따랐다. 일단 이 집에 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와공(瓦工)이셨기 때문에 기와 상태가 완벽했고 서까래 또한 너무나 멀쩡했다. 오래된 나무 기둥이나 대들보를 깎아내니 새 나무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벽에 덧바른 도배지 아홉 겹을 하나하나 떼어내니 맨 밑에서 '昭和十四年'이라 쓰인 일본 신문지가 발견되었다. 쇼와 14년이면 1939년이다. 신문지가 귀했던 옛날임을 생각해보면 이 집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경에 지어진 것 같았다. 우리는 신문지 조각을 들고 가서 유리 액자에 넣어 대문 옆 벽에 걸고 옆에 간단한 설명을 써넣었다. 집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웃 복도 있었다. 우리와 담을 마주하고 있는 한옥집에서 '살림교회'를 운영하시는 내외분들은 두 달간 발생한 그 많은 먼지와 소음에도 단 한 번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참아주셨다. 우리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참외 한 상자를 사서 들고 갔었는데 끝까지 사양하시는 바람에 상자를 마당에 내던지듯 놓고 와야 했다.


두 달간의 공사가 끝나고 지난 일요일에 이사를 왔다. 아직은 짐 정리도 끝나지 않은 집이지만 수요일부터 사람들이 놀러 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온 손님은 자신의 공유 거실을 내 서재처럼 쓰게 해 주었던 '파란대문집'의 공간주 이정옥 대표와 새로 사귄 이웃 주민이었다. 비건인 그 이웃을 위해 아내는 야채와 두부 중심으로 이루어진 '비건 밥상'을 차리고 얼마 전 여의도에서 식당을 하는 친구가 선물로 가져온 샴페인도 꺼냈다. 너무 맛있게 지어진 밥을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독하다 토요일'의 멤버이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시는 오진이 선생이 연락을 해왔다. 지금 소설가 조선희 선생, 무용감독 김윤진 선생과 함께 성북동에 왔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옥집에 잠깐 들러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반색을 하고 어서 오시라고 소리를 질렀고 조금 있다가 세 분이 먹던 안주를 싸가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해진 마당에 들어선 오진이 선생이 한옥 툇마루와 문틀에 연방 감탄을 하며 한옥 수리하느라 고생했다는 치하를 하셨다.

아직 테이블이 없어서 마루에 있는 차탁에 둘러앉아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조선희 선생은 <씨네 21>의 편집장 시절부터 팬이었던 분이었다. 아내는 "조선희 편집장님 계실 때 기자들이 제일 글을 잘 썼다."라고 말했고 나는 "아직 [세 여자]를 읽지 못했는데 조선희 선생이 오신다고 해서 이거 오셔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라고 했더니 다들 웃으셨다. 아무래도 한옥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 집 구입과 공사에 필요한 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는 기본적인 질문부터 서울 시내 한옥에 대한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조선희 선생은 선배님 중 한 분이 한옥을 서서 고쳐 사신 적이 있는데 해마다 수리를 거듭하느라 고생하는 걸 본 적이 있다고 하면서 돈이 많이 들더라도 우리처럼 처음에 확실하게 공사를 하는 게 낫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독하다 토요일'이나 '토요식충단' 같은 무용한 것들을 주로 하고 있다고 했더니 한참 흥미롭게 듣다가 만약 독토에서 [세 여자]를 다루면 직접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한국사람들이 한국 소설을 너무 안 읽는 게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독하다 토요일'에서는 한국 소설을 주로 읽는다고 했더니 김윤진 선생이 자기도 [세 여자] 이후로 한국 소설을 읽어본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고 말했다. 요즘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이 뭐냐는 조선희 선생의 질문에 아내가 조해진의 [단순한 진심]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얘기를 했고 심윤경의 팬인 나는 [달의 제단]과 [사랑이 달리다] 같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심윤경의 다채로운 입담과 필력에 대해 얘기했는데 마침 조선희 선생도 심윤경을 무척 좋아해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부터 시작된 그의 작품들에 대해 길게 수다를 떨었다. 밤 열한 시 이십 분이 넘어서야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냐'라고 하면서 오진이 선생 일행이 먼저 일어나 황급히 전철역으로 향했고 이정옥 대표와 새 이웃은 더 앉아 막걸리를 마시다 새로 한 시가 좀 넘어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안방에 누워 아내와 함께 게스트룸을 뭐라 부를까 하다가 내가 농담으로 "손님방 사랑과 어머니"라고 했더니 아내가 말도 안 된다고 하며 그냥 '손님방'이라고 부르자고 했다. 목요일엔 동네 후배 커플이 찾아와 손님방에서 묵고 갔다. 후배는 방명록도 쓰고 자기는 첫손님이니까 돈을 내야 한다고 하면서 굳이 현금을 내놓고 갔다. 아내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결국 '그 마음이 이뻐서' 받았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크기나 값과 상관없이 그저 '사람들이 자주 놀러오는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80년 된 한옥을 사서 수리한 이유도 이 집이 한옥이라서가 아니라 탁트인 마당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함께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며 어울리는 모습이 그려져서였다. 이제 성북동 소행성 '시즌2'가 시작되었다. 당장 여기서 무슨 일을 할 것이냐 물으면 아직은 딱부러진 대답을 할 순 없겠지만 말끔하게 비어진 마당과 툇마루, 에폭시로 마감된 마루와 주방, 작업실 등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주저앉아 미소를 짓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 집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완성해 줄 것이다. 기분 좋게,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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