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됐고, 밥이나 사줘요.”

도시형 한옥으로 이사 와 3일째

by 편성준

글씨를 전문가처럼 잘 쓰는 건 아니지만 한옥 대문엔 내가 쓴 캘리로 '성북동小幸星'이라는 문패를 달고 싶었다('성북동에 있는 작지만 행복한 집'이란 뜻이다). 아직 글씨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나무 문패를 어떻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일상에서 커피를 마시던 아내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써서 사람들에게 물어봐."라고 했다. 그래서 담벼락에 질문을 올렸다.


새로 이사 온 집에 제 글씨로 ‘성북동小幸星’이라고 가로로 써서 작은 문패를 하나 걸고 싶은데 전각 나무문패 제작을 어디에 맡겨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는 목공방도 없고. 혹시 아는 분 계시면 좀 알려 주십시오.


금세 댓글들이 달렸는데 글씨도 잘 쓰고 전각도 하는 작가 박사(Park Sa) 님에게 부탁해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올라왔고 태그가 된 박사 님도 '돌에만 해보고 나무문패는 한 번도 안 해봤다'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갑자기 일이 너무 커지는 것 같아서 정중하게 사양을 하면서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정훈, 여상 등은 조각도를 사다가 직접 제작해 보라고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은하가 알려준 대로 포털에서 업체를 검색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뚜라미 선배인 진희 누나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목공예를 전공했고

완구와 방송캐릭터 디자인을 하다가 남의 회사 제품이 아닌 자신의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어 지금은 ‘브레인공작소’라는 완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진희 누나라면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진희 누나는 매우 반가워하며 집수리는 잘 돼가냐고 물었고 내가 벌써 다 끝내고 일요일에 이사를 왔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지금 잠깐 들러도 되겠냐고 물었다.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아들 무정이가 온라인 수업을 끝내고 이제 대면 수업을 시작해서 학교에 데려다주러 왔는데 마침 동대문 근처라는 것이었다(중대 연영과는 대학로에 있다고 한다). 나와 아내는 새 주소를 보내주며 얼른 오라고 했다. 아침부터 모자라는 잔금과 생활비 등 돈 걱정으로 얼굴이 누렇게 떴던 아내와 나는 돌아오는 길에 거실에 놓을 꽃을 조금 사고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아내는 예전부터 진희 누나를 좋아했다.

아내와 어제 맞춰 놓은 시루떡을 돌리러 다녔다. 옆집에 제일 먼저 떡을 드리고 골목길에 있는 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면 새로 이사 왔다며 떡을 드렸다. 거의 매일 가는 편의점이나 음식점에도 떡을 드렸고 공사 때 주차 문제 등으로 폐를 끼쳤던 집과 우리 집을 소개해 준 부동산 중계소 등에도 갔다가 진희 누나가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골목 입구로 나갔다. 진희 누나는 대문 옆 미니 정원을 보고 이쁘다고 칭찬을 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툇마루가 마음에 든다고 거듭 감탄을 했다. 집안에 고양이 순자가 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무정이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했다.

진희 누나는 오는 길에 과일 가게도 하나 보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사 왔다고 하길래 우리가 "과일은 됐고, 밥이나 사주세요."라고 말했더니 활짝 웃었다. 무정이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동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원래 낯선 사람을 좋아하는 순자이긴 했지만 무정이한테는 정말로 완전 무장해제였다. 순자가 배를 드러내고 갸르릉 거리는 걸 본 진희 누나는 무정이 앞에서는 늘 동물들이 마음을 여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무정이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어, 흰이 있네?!"라고 외쳤다. 한강 작가의 연작 소설 [흰]이었는데 우리가 '독하다 토요일'에서 함께 읽느라 두 권이 있었다. 아내는 한 권은 전에 나온 판본이고 또 한 권은 김민정 편집자가 새롭게 만든 책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무정은 내가 귀퉁이를 많이 접고 밑줄도 친 예전 판본을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먼저 읽은 사람의 흔적이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책과 함께 연극영화과 학생이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면서 조선 최고의 광대 이야기인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까지 챙겨 주었고 나는 예전에 무정이에게 빌린 [개와 나의 일곱 가지 약속]이라는 책을 아직도 못 읽었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사과를 했다. 진희 누나에게 빌렸던 책도 있는데 제목이 생각 안 난다고 했더니 진희 누나도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다.


누나와 얘기를 하고 있는데 피지에 있는 한상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 문패 때문에 전화를 했다는데 결론은 '니가 직접 문패를 만들어야 더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이상론이었다. 그러나 똥손인 내가 어떻게 조각도로 글씨를 팔 수가 있겠는가. 나는 알았다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진희 누나에게 전화를 바꿔줬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진희 누나 남편인 홍민이 형 이야기까지 하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어딜 갈까 하다가 동숭동에 있는 '혜화칼국수'에 가서 수육과 칼국수를 먹기로 했다. 아내는 무정에게 툇마루에 쌓아 두었던 가방 중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 보라고 했다. 가방 마니아였던 내가 쓰던 가방들과 아내의 백들을 '당근마켓'에 팔려고 모아 두었던 것이다. 다행히 무정이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고른 무정이가 가방을 크로스로 매고 좋아했다.


진희 누나가 세워 놓은 차까지 가는 길에 떡을 하나 더 들고나가 우리 집 뒤에 있는 한옥집에 들렀다. 어른들은 안 계시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떡을 받았다. 차를 타고 혜화칼국수로 갔다. 우리가 주차를 하고 있는 동안 아내는 먼저 들어가서 수육과 생선튀김을 시켰다. 무정이는 맥주를 마시기로 하고 나와 아내는 소주를 시켰다. 운전을 해야 하는 진희 누나는 물을 마셨다. 아내는 우리 집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화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무정에게 책을 읽고 싶거나 멍 때리고 싶을 때면 아무 때나 와서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무정이가 정말이냐고 묻자 내가 "정말인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며칠 내로 아무 때나 우리 집에 와 보라"며 웃었다. 진희 누나에게 우리 한옥을 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뭐였냐고 물었더니 첫 째는 툇마루 밑에 남아 있는 옛날 타일이 정겨웠고, 두 번째는 안방 붙박이장에 붙인 창호지, 그리고 세 번째는 마루와 주방 바닥을 에폭시로 처리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에폭시 바닥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집안 분위기를 확 다르게 만드는 힘이 있노라고 말했다. 부드러운 눈으로 살핀 날카로운 소감이었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무정 때문에 예술 얘기를 많이 했다. 나는 "예술이란 무용(無用)한 것에 가치를 두는 일인데 한옥의 마당이야말로 무용한 곳"이라는 궤변을 펼쳤는데 마음씨 순한 무정이가 고개를 끄덕여 줘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우리 집에 배우나 예술가들이 와서 술을 마실 때는 얼른 연락을 할 테니 모르는 척 그냥 오라고 하며 미리 생색을 냈다. 지난겨울이었나 무정이가 [인형의 집 2] 공연을 보고 까마득한 학교 선배 박호산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기억해낸 것이었다. 나는 진희 누나에게 우리가 한옥에서 살게 된 것도 한옥을 고집해서가 아니라 개인주택을 추구하다 보니 한옥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어제 '한옥에 살지만 한복은 안 입습니다'라는 글을 썼다고 했더니 웃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무용한 대화를 잔뜩 나누었더니 그제야 좀 살 만했다.

문패는 결국 송환영 부대표님이 만들어 주시기로 했는데 소박한 캘리를 써서 보냈더니 벌써 이렇게 시안을 만들어 보내 주셨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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