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살지만 한복은 안 입습니다

도시형 한옥 수리 53일째(수리는 끝났지만)

by 편성준

토요일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이사를 하루 늦추게 되었다. 우리가 살던 집으로 들어오는 세입자(우리에게 집을 구입한 분이 곧바로 전세를 내는 바람에 집주인보다 세입자가 먼저 들어와 살게 되었다)가 자신은 이사 날짜를 하루 늦춰도 상관없다고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을 해주었고 이삿짐센터도 일요일 스케줄이 괜찮다고 해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덕분에 하루의 여유를 갖게 된 아내와 나는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해 먹고 한옥집으로 내려와 청소를 시작했다. 비 오는 휴일 아침에 아무도 없는 한옥 툇마루에 둘이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참 좋았다. 아내는 "오늘은 짐이 들어오기 전이니까 텅 빈 한옥을 보고 싶은 분들 있으면 좀 오라고 할까?"라고 물었다. 그것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페이스북에 '친구 알림'으로 초대를 했다.

청소를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다행히 전날 저녁에 사놓은 빵이 있길래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다가 함께 먹고 있는데 류왕보 대표가 두루마리 휴지를 사 가지고 들어오셨다. 류 대표는 모노톤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으면서 한옥의 짜임새가 좋고 겉모습은 한옥인데 내부는 스페인풍인 것도 재미있다고 하셨다. 아내는 류 대표가 찍은 사진을 보고 '대표님이 키가 크니까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앵글로 집을 본다'며 좋아했다. 비가 오는 툇마루에 앉아 있는 우리 부부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전송해 주셨길래 내가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서 살짝 놀랐다. 점심엔 강순희 선생이 점심을 사 주러 오셔서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과 짜장면, 짬뽕을 먹었다. 밥을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몇 잔 마신 연태고량주에 취기가 올라온 내가 하품을 찢어져라 했더니 아내가 게스트룸에 가서 잠깐 자라고 했다. 이불도 요도 없이 나무 프레임만 있는 침대 위에 올라가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누워 잠깐 달게 잤다.

다시는 이렇게 청소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물걸레로 책꽂이는 물론 대들보까지 여러 번을 닦아냈다. 저녁엔 '옆집 총각'이었던 동현이 와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대기업에서 매장 인테리어를 총괄했던 경력에다가 꼼꼼한 성격까지 겸비한 그의 조언은 찬찬하고도 사려 깊었다. 아무리 공사를 완벽하게 하더라도 끝내고 나면 그땐 알 수 없었던 문제점들이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동현이 사용자 입장에서 다시 제기하는 문제점이나 개선점들을 모두 빠짐없이 받아 적으라고 내게 명령했고 나는 모두 열 개나 되는 지적사항들을 정리해서 아내의 카톡으로 보냈다.


저녁을 먹으러 단골 고깃집 '성북동 10길'에 가서 삼겹살과 한라산 소주를 시켰다. 아내가 술을 마시면서 동현에게 내일 고양이 순자를 하루만 맡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파란 대문 집에 맡겨놓기로 하긴 했는데 아까 내려오다가 우연히 그 집에 들어가는 게스트(파란 대문 집은 게스트하우스이기도 하다)를 만나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더니 고양이를 좀 무서워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동현은 흔쾌히 순자를 맡아 주기로 했다. 순자에게도 다행이었다. 이전부터 순자는 우리 부부보다 동현을 더 좋아한다고 아내에게 욕을 먹을 정도였으니까.


인터넷이 끊어져 TV도 볼 수 없었던 집에 들어가 일찍 잠이 들었던 나는 새벽에 물을 마시려 주방으로 나왔다가 인덕션 위에 있는 물건들을 보게 되었다. 아내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새로 산 인덕션 커버와 안 쓰는 그릇, 그리고 아내가 직접 담근 간장 한 병, 주황색 루크루제 냄비와 도마 한 개, 그리고 전구가 끊어졌을 때 교체할 수 있는 여벌의 LED 등까지. 아내가 내일부터 이 집에 와서 살게 된 세입자에게 주고 가는 선물이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선물은 아내가 물과 소금과 콩 이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만들어 깊은 맛이 난다고 자랑하던 간장이었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아내가 일어나 이 집에서 먹는 마지막 밥을 지었다. 평소처럼 야채를 꺼내지 않고 간단하게 밥만 하고 된장국을 끓여 먹었는데 둘 다 입이 깔깔해서 밥을 남겼다.

이삿짐센터에서 오기 전에 순자를 맡기기 위해 케이지에 순자를 넣고 사료와 화장실 등을 들고나가 동현을 기다렸다. 순자를 맡기고 돌아오니 이삿짐센터 사람이들이 와 있었다. 한 번 와서 견적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그 동네 잘 아니까 안 가봐도 된다'라고 말했다던 사장님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골목이 좁아서 이사하기 어렵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냉장고와 TV, 식탁 등을 모두 놓고 나가기 때문에 비교적 이사가 손쉬울 거라고 했더니 '책이 많다'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뭔가 좋지 않은 조짐을 느낀 것은 집안을 둘러보며 "이런 데서도 사람이 사네..."라고 했던 사장님의 혼잣말이었다. 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삿짐을 나르러 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아내는 한옥집으로 먼저 내려가고 내가 짐 싸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총 다섯 명이 왔고 세 명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젊은이들이었는데 우리말이 서툴렀다. 밖에서 분리수거할 쓰레기들을 정리하다가 안으로 다시 들어가 보니 아내가 세입자에게 남긴 물건들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사장님, 인덕션 위에 있는 물건은 싸지 말라고 했잖아요?"라고 소리를 쳤더니 "아차! 까먹었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랴부랴 계단 아래 있는 탑차로 달려가 보니 짐이 벌써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상자들을 뒤져 간장과 도마 등을 다시 꺼내 올라왔다. 아내가 부동산 앱 '다방'에서 하는 이삿짐센터를 불렀는데 티셔츠에 '09이사'라고 쓰여 있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저희는 다방 하고 영구 두 개 다 해요. 요즘 한 개만 해선 밥 못 먹고살아요."라고 사장님이 말했다.


카톡 메시지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말 아주 잠깐 한눈을 팔았는데 아까 와서 이사 가냐고 묻던 새마을 모자 쓴 할머니가 현관 앞에 있는 텃밭에 와서 그새 가위로 부추를 잘라내고 계셨다. 할머니, 그거 자르시면 어떡해요? 아니, 이사 간다니까 내가 조금 가져가는 거야. 그거 주인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상추 발로 막 밟으시면 어떡해요?! 아, 미안해 미안. 상추 내가 밟았네. 내가 얘기하는 동안에도 부추를 계속 잘라내던 할머니는 수확물을 왼손으로 움켜쥐고 줄행랑을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속이 상했다.


나는 짐이 모두 빠진 것을 확인하고 보일러 점화 플러그를 한 번 닦은 뒤 다시 조립하고 뜨거운 물이 잘 나오는지 시작동을 해본 후 사진을 찍어 세입자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분리수거한 쓰레기들을 버리는 요일과 방법, 길고양이 양오에게 줄 사료가 있는 장소 등을 노티스 하고 내려갔다.

우리가 제일 조심해달라고 부탁한 품목은 간장과 된장이 든 장독이었다. 특히 간장은 미리 반 정도를 다른 밀폐용기에 따라 놓고 이사를 시작해서 무사히 아래 한옥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독 말고 다른 일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일단 젊은 사람들은 우리말이 서툴러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짐들을 들고 이건 어떡해요?라고 묻다가 결국은 창고에 다 쑤셔 박는 식이었다. 아내는 냉장고 정리를 맡은 여성 직원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짐이 많지도 않은데 여직원이 너무 헤매는 것이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책을 아무렇게나 꽂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옷이나 이불 담요 등을 그렇게 쑤셔 넣는 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포기하는 심정이 되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위에서 버리지 못하고 온 물건들 중 쓸 만한 천막형 텐트는 직원 중 하나가 가져가기로 하고 일반 텐트는 아무도 가져가지 않아 마당에 누워 있었다. 대충 정리를 하고 어서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을 한 이삿짐센터 직원과 사장님은 다 끝났다고 하며 입금을 요구했다. 나는 계약금 10%를 제외한 162만 원을 그들이 지켜보는 그 자리에서 송금했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아내는 저렇게 엉터리로 일을 해놓고 180만 원이나 받아간다며 욕을 했다.

아내는 주방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책 정리를 하기로 했으나 마당에 있는 쓰레기들이 너무 많아 그것부터 치워야 했다. 주민센터에서 구입한 폐기물용 부대에 유리병 등 안 쓰는 물건들을 담았다. 4~5인용 텐트를 분리해서 넣었고 걸지 않고 묵혀 두었던 액자들은 박스를 대고 망치로 쳐서 유리와 프레임을 분리해 모두 쓸어 넣었다. 액자 안에서 사람들과 그림들이 부서진 유리 밑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버려야 할 물건들이 일반 쓰레기봉투 네 개와 특수 부대 세 개 반에 가득 찼다.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아내가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얼마 전 새로 생긴 '성북동김밥'에 가서 아내는 김밥과 라면, 나는 제욱덮밥을 시켰다. 마침 손님으로 와 있던 '성북동쭈닭발' 사장님이 왜 그렇게 힘들어하느냐고 물으시길래 오늘 이사를 했다고 했더니 정말 힘들겠다고 말하며 웃으셨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 계산을 하려고 했더니 쭈닭발 사장님이 사주고 가셨다는 것이었다. 너무 뜻밖이고 고마워서 저녁엔 쭈닭발에 가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마당 청소를 다 하고 안으로 들어와 책을 정리했다. 아내는 마루 왼쪽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여행, 출판 관련 책들을 꽂아주었으면 했고 나는 오른쪽 맨 위엔 시집을 모으고 중간엔 세계문학 전집과 대하소설 전집 등을 꽂고 싶었으나 바닥에 책이 너무 많이 널려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출판사를 다니거나 프리랜서로 일하며 기획했던 [독공] [러브 온톨로지] [마흔의 심리학] [미래시민의 조건] [여자가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나는 1인기업가다] [라오넬라 새벽 두 시에 중독되다] [대학 사용법] 등을 모두 모아 한 칸 안에 정렬하는 쾌거를 올렸다. 내 작업실 책꽂이엔 예전에 내가 구독했던 <키노> <판타스틱> <리뷰> <상상> 같은 잡지들을 꽂았고 고등학교 때 구독했던 <현대문학>을 시작으로 <문학동네> <문예중앙> 같은 잡지들도 몇 권씩 아래층을 차지했다. 좀 더 꼼꼼하게 정리를 하고 싶었으나 아내가 부엌과 안방, 게스트룸을 초고속으로 정리하고 돌아와 배가 고프니 어서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성북동쭈닭발'에 가서 부추쭈구미를 먹고 들어왔다. 아내가 "오늘은 너무 지쳤으니 생각은 내일부터 하자"고 말했다. 아내가 TV로 새로 시작된 차승원, 유해진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순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환경이 바뀌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아직 욕실 문을 혼자 열지도 못해 아주 곤란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순자뿐 아나라 우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문득 가방을 열어 지난번 잔금 치르고 남았던 현금 중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주었더니 아내가 "처음이야. 이렇게 내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돈을 주는 사람은."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우리는 바보 같이 서서 한옥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왜 한옥을 고쳐서 살 생각을 했을까. 앞으로 이 집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구체적으로는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소가 주는 어떤 에너지를 믿어보기로 했다. 분명한 것은 한국적이거나 고전적인 것을 좋아해서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저 개인주택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발전해 '마당이 있는 도시형 한옥'에 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한옥에 산다고 해서 한복을 입거나 다도를 하는 유난을 떨 생각은 없다. 더구나 나는 개량한복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니까.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었는데 서촌에서 가장 커뮤니케이션하기 힘든 사람이 '뿔테 안경에 개량한복을 입고 말총머리를 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내와 나는 갑자기 그 얘기를 떠올리면서 깔깔깔 웃었다. 우리에겐 앞으로도 평생 개량한복 입을 일은 생기지 않을 거란 얘기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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