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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27. 2020

수박 한 통

성북동 소행성 이야기

아파트에서 혼자 살 때  이웃들과 공동으로 쓰는 음식쓰레기 수거함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던 게 수박껍데기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다가 여름이 시작되면 어느새 쓰레기통 안에 등장하곤 했던 수박껍데기들. 빨갛게 익은 수박 살은 다 파먹고 허옇게 껍질 안쪽만 배를 드러내고 있던 수박껍질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건 아,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여름엔 다 수박을 사 먹는구나,였다. 그 후 대형마트에서 비닐 랩으로 싼 일인가구용 조각 수박을 판매하긴 했지만 난 그걸 사 먹지 않았다. 굳이 뭐 저렇게까지 해서 수박을 먹을 일이 있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결혼은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나 나나 야채는 많이 먹어도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또 수박 한 통은 여전히 우리 둘이 먹기에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어제 고은정 선생이 수박 한 통을 들고 한옥집으로 오셨다. 수박이 너무 컸다. 고은정 선생이 집으로 돌아가신 후 아내는 "우리가 틀림없이 수박 한 통 못 사 먹고 여름을 날 걸 알고 선생님이 일부러 사 오셨을 거야."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사를 오면서 냉장고 용량을 대폭 줄였기 때문에 지금 수박을 쪼개도 넣어 둘 곳이 없다. 그래서 어제 왔던 손님 수안 씨에게도 수박을 주지 못했다. 나는 오늘 성북동김밥집에 가서 이걸 반으로 쪼개 성북동콩집이랑 나눠 먹으라고 할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아내는 위쪽에 사는 세미 씨를 불러야 하나...라고 중얼거린다. 수박 한 통 때문에 아침부터 즐거운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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