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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18. 2020

소행성 풀장에 오신 최연소 손님들

한옥 마당에 어린이 풀장 개장하던 날

아내는 설레는 표정이었다. 한옥을 고쳐 이사를 하고 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평균 일주일에 세 번은 손님맞이를 한 것 같은데 아내가 이렇게 즐거운 표정으로 손님들을 기다리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번에 오는 손님들은 우리 집에 온 이들을 통틀어 가장 어린 사람들이었다. 아내는 언덕 꼭대기에 살던 작년에 PVC로 만들어진 소형 풀장을 구입해 집 뒷마당에서 이 친구들과 논적이 있는데 올해는 네모 반듯한 한옥 마당에 손바닥 풀장을 만들면 좋겠다며 벌써부터 날이 더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마트에서 장을 좀 본 뒤 마당에서 아내와 함께 수영장 프레임을 조립하고 안을 깨끗이 닦아낸 뒤 물을 채웠다. 혹시 어린 친구들이 다칠지도 모르니 수영장 밑엔 캠핑용 깔개를 먼저 깔고 그 위에 풀을 올렸다. 수영장 안의 물이 차갑지 않을까 아내가 걱정을 했지만 햇볕이 워낙 따가워 금방 따뜻해질 것 같았다.

오후 2시가 넘자 경영 씨의 아들 종운이와  딸 시윤이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와서 골목 끝으로 뛰어나가 보니 경영 씨는 아직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상황인데 시윤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먼저 전화부터 했다는 것이었다. 경영 씨가 주차를 하러 간 사이 나는 종구와 시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소변이 급한 시윤이는 마당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 문을 두드리고 열어보니 오줌을 다 눈 시윤이가 변기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가 와서 뒤처리를 해줄 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내가 화장지로 오줌을 닦아주고 팬티와 바지를 올렸더니 시윤이는 "엄마는 끝나면 엉덩이를 팡팡 쳐주는데."라고 말하며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겨우 주차를 한 경영 씨가 집으로 왔다. 아들인 종운이는 여덟 살, 딸 시윤이는 다섯 살이다. 아내는 마침 정해진 시간까지 무슨 서류를 급하게 접수하는 일을 부탁받고는 마루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번갈아 쳐다보며 집중하던 중이라 게스트룸으로 아이들을 안내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게 하는 일은 내가 맡았다. 시윤이는 풀장 앞에 서서 손만 물에 담가보고는 "아, 좀 차가울 것 같은데."라며 망설였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갔고 종운이는 처음부터 용감하게 첨벙 들어가더니 금방 발장구를 치며 놓았다. 좁은 풀인데도 즐겁게 노는 게 신기했고 풀장 테두리를 손으로 꽉 잡고 풀장 전체를 들어 올릴 듯 괴력을 발휘하는 종구를 보면서 '아이는 아무나 키우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가까스로 서류 접수를 마친 아내가 마당으로 나와 아이들과 놀고 있는 동안 나는 비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내 책상 앞에 앉아 '괴로우나 즐거우나 아내 사랑하세'라는 공처가의 캘리를 한 편 쓰고 캘리그라피에 딸린 사연을 정리했다. 산책 삼아 혜화동의 동양서림에 가서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한 권 산 뒤 한성대입구역 근방에서 "나라사랑이 밥 먹여주나? 아내 사랑이 밥 먹여 주지..."라고 바보처럼 중얼거렸다는 내용이었다. 아내가 어린이들 먹을 걸 준비하고 있는데 소영의 아들 희수가 아주머니와 함께 도착했다. 희수가 전에 와본 적이 있어서 아주머니를 안내했다고 했고 더 일찍 올 계획이었는데 희수가 집에서 잠깐 낮잠이 드는 바람에 늦었다고도 했다. 아내는 종운 남매와 희수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 그들은 이 날이 첫 만남이었다.  희수는 집안으로 들어서 아이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더니 곧장 마루로 들어와 말했다. "저는 오늘 물에 안 들어갈 거예요."


우리는 희수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 희수야. 너는 그럼 마루에서 순자랑 놀아라." 희수는 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그런다고 고마워할 순자가 아니었다. 순자의 뚱한 표정에 당황하고 있던 희수에게 아내가 다가가 '수영복도 가져오고 물총도 가져왔는데, 이제 와서 물에 안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살살 꼬셨다. 그래도 요지부동이던 희수는 아내가 물총에 물을 채워주자 쭈볏쭈볏하며 마당으로 나갔는데 마당 풀장 주변으로 물을 마구 튀기면서 소리를 지르는 종운이와 시윤이에게 물총을 한 번 쏜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아이들은 어느새 한 편이 되어 아내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내도 호스를 들고 반격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내는 허리 아래만 공격했지만 희수는 아내의 얼굴을 정확히 겨냥해 물총을 쏴대고 있었으니까. 역시 정직하거나 신사적인 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마루 방충망 문 뒤에서 낄낄거리며 그 광경을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찍었다. 희수는 일곱 살이라 종운이에게는 동생이었고 시윤이에게는 오빠였다. 층간소음 같은 것 신경 안 쓰고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건 의외로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와 삼선교 이모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한 그릇 먹고 스타벅스에 가서 고양이 순자가 말을 한다는 내용의 연재 글을 하나 썼다. 일요일에 있었던 진희 누나의 딸 현경이의 결혼식에 얽힌 내용이었다. 이 편에서 순자는 천재 고양이를 넘어 초능력 고양이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나도 아직 모르겠다. 아무튼 사소하면서도 냉소적인 순자와의 대화는 계속 이어 나가 볼 생각이다. 며칠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나는 어떻게 장(醬)한 아내와 살게 되었나'라는 글의 초고도 좀 썼다. 노트북 자판을 토닥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윤이가 나를 몇 번이나 찾으니 빨리 집으로 와야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왜 나를 찾지?" "몰라. 별일이네." 아까 안 쳐준 궁둥이를 지금이라도 쳐달라는 걸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갔더니 시윤이는 이미 나의 존재를 잊은 듯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이 된장찌개와 오이지에 밥을 엄청 퍼먹었다고 하며 혀를 내둘렀다. 전날 손님들에게 안주로 내놨던 돼지고기 수육 중 남겨놨던 한 덩이를 삶아 내놨더니 그것도 엄청 잘 먹더라는 것이었다. "무슨 애들이 수육을 그렇게 잘 먹어? 종운이는 고기를 한 번에 두 점씩 집어먹더라." "하루 종일 뛰어놀았으니 배가 안 고프겠어? 하하." 아내가 대단히 뿌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여섯 시 반에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7월과 8월에도 어린이 손님들에게 한 번씩 더 와달라 했다며 웃었다. 마당의 풀장은 뒤집어서 물이 다 마르면 박스에 넣어 보관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세 아이 나이를 모두 합쳐도 스무 살이 될까 말까였다. 우리는 둘이 합쳐 백 살이 넘는데,라고 생각하며 아내를 쳐다보았다. 괜히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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