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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17. 2020

나는 어떻게 '장(醬)한 아내'와 살게 되었나

한식과 인문학이 만난 우리 집 소울 푸드 이야기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 것처럼 굴던 막내아들이 뒤늦게 데려 온 여자 친구를 보고 어머니는 너무나 좋아하셨다. 친정어머니를 일찍 여읜 여자 친구도 시어머니가 '말이 통해서 좋다'라고 하며 정다운 딸처럼 굴었다. 이미 나와 동거를 하고 있었던 여자 친구는 시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만들어 주시는 김치나 밑반찬을 조금씩 얻어올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머니가 만든 가정식엔 특별한 기교는 없지만 뭔가 '어른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식날 무슨 옷을 입으실까?'가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년에 산 검은색 한복을 조금 수선해서 입으면 되겠다고 하던 어머니는 며칠 후 방 안에서 살짝 넘어졌다고 했는데 그대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그 전 해에 한 번 위기를 넘겼던 뇌경색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병실에서 이틀 만에 잠깐 깨어난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시다가 여자 친구가 집에서 쑤어 온 미음을 아주 달게 드시고는 크리스마스 다음날 새벽에 편안하게 돌아가셨다. 여자 친구는 자신이 만들어 간 음식을 마지막으로 맛있게 드셔 주신 시어머니가 고맙다고 하면서 울었다. 그녀와 나는 다음 해에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을 하며 아이 넷을 키우신 분이었다. 그때의 어머니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직장 생활이 끝나면 집으로 와서 식구들 밥상 차리고 집안일을 하는 동시에 자식들의 도시락까지  싸야 하는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황해도 개성에서 살다가 6.25 때 월남하신 어머니는 보쌈김치와 조랭이떡국을 좋아하셨는데 나는 그보다도 어머니가 가끔 새우젓과 두부를 넣고 끓여주는 젓국이 그렇게 시원하고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아침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가 어머니에게 젓국 끓이는 법을 딱 한 번 배운 적이 있다고 하면서 만들어 주었다. 육젓을 넣고 끓인 젓국은 맑은 국물이지만 비단결 같은 찰기가 있었고 부드럽게 씹히는 명란은 뜨거운 국물과 함께 나의 혀를 휘감으며 사회생활로 쓰린 속을 달래줬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한 데다가 또 술까지 마시고 들어와 조금 늦잠을 자는 날이면 어머니는 아침밥을 차리면서 어김없이 나를 깨우시곤 했다. "그래도 한 술 떠야지. 아침 먹고 다시 누웠다가 출근하든지."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차려준 식탁 앞에 앉으면 늘 뜨거운 국물이 있었고 나는 그걸 한 모금 숟가락으로 떠 넣으면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출근할 힘을 얻곤 했다. 국이 조금이라도 식으면 다시 데워주던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그땐 왜 그리도 몰랐던 것일까.


반찬가게 아줌마들과 친했던 총각


총각 시절,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갈 때마다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반찬가게 아줌마'들과 친해지는 것이었다. 어머니 덕분에 혼자 살면서도 늘 아침밥을 챙겨 먹는 버릇을 들였던 나는 전기밥솥의 '예약 취사' 버튼을 활용해 밥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지만 반찬은 계란 프라이나 포장 김, 포장 김치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 댁에 가서 매번 반찬을 얻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가정집 반찬처럼 짭조름한 장조림이나 심심한 총각김치를 담가 파는 시장 반찬집은 내 식생활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가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물론 나보다 밥을 잘했고 반찬도 곧잘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음식 솜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내가 경기도와 서울 변두리의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음식을 먹고 자라났듯이 대전의 하숙집 셋째 딸로 태어난 아내도 별로 좋지 않은 식재료와 화학조미료가 든 음식을 먹고 자란 평범한 '애어른'일뿐이었던 것이다.


맞벌이를 하는 집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우리도 한 번에 밥을 많이 해서 소분해 냉동실에 얼려놨다가 한 덩이씩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곤 했다. 냉동실엔 비닐 랩에 싸인 하얀 밥덩이 외에도 언제 던져 놨는지 모를 검은 비닐봉지가 수두룩했는데 가끔은 소고기인 줄 알고 만진 검은 봉지에서 꽁꽁 언 생선의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튀어나와 나의 손을 찌르기도 했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아침을 거의 안 먹다가 나와 결혼하는 바람에 조식을 차리게 된 아내는 '매일매일 밥상'이라는 제목으로 밥상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연재했는데 이게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이 우리 밥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무래도 음식이나 그릇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아무거나 먹고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 식생활을 조금씩 바꿔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편리하게 포장음식을  돌려 먹던 전자레인지를 아파트 수위실에 가져다 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아날로그 식생활'은 시작되었다. 고장 난 전기밥솥을 버리면서 새로 산 국산 압력밥솥으로 그때그때 뜨거운 밥을 해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옛날 엄마가 밥을 해주던 그 부엌의 따스함과 다시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인문학이 스민 따뜻한 한식과 만나다  


아내는 뭐든 배우는 걸 좋아해서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을 보지 않는 강의를 즐겨 들었다. 꽃을 좋아해서 시작했던 꽃꽂이는 지금까지 몇 년째 이어오고 있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시작한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운동도 꾸준히 하는 편이다. 특히 음식을 좋아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본 요리, 스페인 요리, 프랑스 요리 등을 섭렵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꽂힌 것은 싱겁게도(?) '한식'이었다. 그것도 갈비찜이나 신선로 같은 화려한 궁중요리가 아니라 평범한 가정식이었다. "매일 먹는 한식을 왜 돈을 내면서 배워야 해?"라는 나의 의문을 바꿔준 결정적인 계기는 아내가 서교동 '끼니'라는 곳에서 들었던 음식 인문학 강의였다. 평소에도 식재료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가 우리 땅에서 나는 제철 식재료를 중심으로 음식의 본질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따뜻하게 접근하는 고은정 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선생은 화려한 조리법 대신 밥하는 법, 김치 담그는 법, 된장·고추장 담그는 법 등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가르치는 음식 활동가였다. 김치나 장 담그는 법을 굳이 따로 배워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면 이런 것들은 막상 종갓집 며느리가 되어도 제대로 배우기 힘든 '기본기 중의 기본기'였다.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기본기가 튼튼해지면 요리에 자신감이 붙고 나름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기준과 요령도 생긴다. 출판기획자로 오래 일해 온 아내는 강의의 뜻이나 내용은 너무 좋은데도 선생의 스튜디오가 지리산에 위치하고 있다는 핸디캡 때문에 서울의 수강생들을 모집하기 어렵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다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일박이일 지리산 제철음식학교'를 열어보는 게 어떠냐는 역발상을 내놓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이면 지리산에 모여 함께 먹고 자면서 오직 음식 수업에만 매진한다는 이 기획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강의 기획을 한 아내가 여기 가서 음식을 제대로 다시 배운 것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지리산에 있는 '맛있는 부엌'으로 달려가 밥하는 법부터 채소 다듬는 법, 장이나 김치 담그는 법 등을 배우며 스마트폰에서 벗어난 '힐링의 시간'까지 부록처럼 누렸다.

아내 말대로 장을 담그는 것은 생각보다 참 쉽다. 우리집에서 장을 가르는 날이면 하나 둘 친구들이 모여 작은 파티가 열린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 브리야 사바랭이 했다는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현재의 식생활이 그 사람의 미래까지 바꿔줄 수 있다는 통찰을 주는 명제다. 건강한 제철음식으로 이루어진 한식으로 바뀌면서 우리 집엔 설탕과 화학조미료가 완벽하게 사라지고 집에서 담근 간장과 된장, 들기름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밥상이 차려졌다. 채소를 비롯한 식재료는 동네 마트에서 사기도 하지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분들의 상품을 하나씩 먹어보고 신중하게 선택한 뒤 그때그때 소량 배달로 받아먹었다. 이른 봄의 봄동부터 시작해 초여름에 나는 각종 야채들과 여름 오이 등 이 땅에서 나는 제철음식들은 그때그때 구할 수 있어 가격도 비싸지 않고 싱그러웠다. 음식 쓰레기 배출이 자연스럽게 줄었고 냉동실에 쌓아놓는 식재료가 적어지니 냉장고 사이즈도 더 작아졌다. 건강한 한식 밥상은 몸 건강뿐 아니라 주거생활까지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는 어느 순간부터 아파트를 벗어나 개인주택에서 살고 싶어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장독대'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익어가는 장과 개인주택 장독대에서 햇볕을 제대로 받고 맛이 깊어지는 장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인주택으로 이사를 간 아내는 이제 해마다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김장을 하고 장을 담근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한 번 알기만 하면 장 담그기만큼 쉬운 일도 없다는 것이다. 좋은 메주와 소금물만 있으면 누구나 담글 수 있는 게 장이었다. 함께 장을 담가 우리 집 장독대에 맡기고 간 친구들은 몇 달 후 '장 가르기'를 하러 다시 모이는데 이 날은 돼지고기 수육도 삶아 작은 파티를 연다. 장을 담글 줄 아는 '장한 아내' 덕분에 나는 가까운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고 한식이라는 게 이토록 트렌디한 음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담근 장과 김치에서는 그 옛날 어머니의 음식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어른의 맛'이 났다. 한식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좋은 어른으로 성장한 느낌이었다.  

성북동 언덕 꼭대기에 있던 장독대가 한옥마당으로 옮겨왔다. 다행히 새로 이사 온 한옥 마당도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든다.

함께 나누는 음식이 진정한 소울 프드


"언니, 나 부탁이 있는데... 간장 한 병만 줄 수 있어요?"

우리 집에서 간장을 먹어보고 그 깊고 정갈한 맛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여자 후배가 아내에게 이렇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내가 빙그레 웃으며 장독대에 가서 간장을 한 병 담아 정성껏 포장을 해 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가장 좋은 음식은 따뜻한 마음을 담아 함께 나눌 수 있는 음식이다. 흔히들 '소울 푸드'는 고향이나 부모님을 통해서만 전해질 거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황해도 개성이 고향이었던 우리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이었지만 이젠 돌아가셔서 그걸 맛 볼 방법이 없다. 아내는 추운 겨울밤에 엄마가 장독대에서 꺼내 쭉쭉 찢어주던 시원한 김치와 함께 먹었던 따뜻한 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내는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고향의 맛'을 억지로 복원하는 대신 좋은 식재료와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나만의 소울 푸드'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 나누는 건강한 한식(韓食)'이다. 나는 일본 요리나 스페인 요리를 능숙하게 해 주던 이전의 아내도 좋지만 촌스럽고 투박한 된장국이나 간장 외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맑은 미역국을 내주는 지금의 아내가 훨씬 더 좋다. 그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특별한 요리보다는 갓 지은 밥에 김장김치나 된장국으로 이루어진 정갈한 밥상을 더 좋아했다. 우리 집은 맛있는 김치가 너무 쉽게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평소엔 김치찌개도 잘 안 끓여 먹지만 좋은 사람을 보면 따로 플라스틱 그릇에 김치를 가득 담아주며 웃는다. 좋은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내 아내에게 장독대에서 꺼낸 된장이나 간장을 한 번이라도 받은 적이 있다면 이미 최고의 친구로 인정받은 것이라 여겨도 무방하다. 한식과 인문학이 적절히 배합된 우리 집 소울 푸드를 내준다는 것은 앞으로 당신에겐 못 해줄 게 없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건 '장한 아내'와 사는 남자가 누리는 거만한 행복이기도 하니까.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산해진미가 아니라 평범하지만 정성껏 맛있게 지은 집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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