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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16. 2020

전자책, 나에겐 요술램프의 지니 같은

어느 게으른 독서가의 전자책 찬양

나는 전자기기와 그리 친하지 못한 편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도 남들에 비해 활용도가 형편없이 낮은 편이지만 생활에 별 불편이 없으니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책은 당연히 종이책을 좋아한다. 손에 전해지는 종이의 질감이나 묵직한 느낌, 책장을 넘길 때의 설렘,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등의 가지런한 모습까지...... 그렇게 종이책만 좋아하던 내게 어느 날 전자책이 왔다. 아는 친구가 'PAPER'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는 별로 쓸 마음이 없어서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가지고 있으니 한 번 사용해 보라며 보내준 것이었다. 물론 나도 이전에 전자책을 시도해 보지 않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제품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너무 느리고 화면도 어둡고 뭔가 에러가 자꾸 나서 그냥 손에서 놓아 버렸던 것이다.

어제 마이클 코넬리의 1996년작 [시인]을 전자책으로 다 읽었다. "나는 죽음 담당이다."라는 매력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강력계 형사로 일하다 자살한 쌍동이형 사건이 사실은 살인이었음을 직감한 신문기자 잭 매커보이의 활약상을 그린 스릴러다. 에드거 앨러 포의 시들을 모티브로 삼은 살인자의 흔적도 흥미롭고 아름다운 FBI 수사관 레이철과의 갑작스러운 섹스와 짤막한 로맨스도 스토리 라인과 탄탄하게 얽혀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특히 앞부분에 있는 스티븐 킹의 추천사는 독자로서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스릴러 소설이었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빠져 읽었다. 이것이 전자책의 매력이다.


전자책의 또 좋은 점은 읽고 싶을 때 바로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새벽 두 시에 페이스북에서 정혜승 전 청와대 뉴미디어 비서관의 글을 읽다가 [힘의 역전]이라는 책을 앉은자리에서 샀다. 이 책은 메디치미디어의 김현종 대표가 기획한 포럼을 진행했던 정혜승 저자가 엮은 책인데 나는 첫 챕터에 나오는 최재천 교수의 "토론은 싸워서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서로 다른지 고민하고, 자기 생각을 다듬는 자리입니다."라는 말이 너무나 섹시하고 좋았다(지금 이렇게 쉽게 인용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때 '밑줄 치기' 기능으로 이 대목을 표시해 놔서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페친이자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김광혁 씨가 유튜브에 출연해 추천해 준 켄 리우의 뛰어난 SF 단편집 [종이 동물원] 얘기를 듣자마자 사서 읽는 행운을 누린 것도 통쾌한 일이었다. 이 책을 읽고 너무 즐거운 나머지 예전에 읽었던 토마스 귄지그의 소설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을 책꽂이에서 찾아 다시 읽을 수 있었기에 더욱 흐뭇했다. 대학로에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의 연극 [해방의 서울]을 본 다음날 아침 '리디북스'에 들어가 그의 희곡집 중 [너무 놀라지 마라]라는 작품을 구입해서 바로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집에 전자책 단말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자책은 특히 소설을 읽을 때 좋다. 언제 어디서나 이어서 읽기 편해서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 같은 추리소설로 시작한 전자책으로 소설 읽기는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나 정명섭의 [유품정리사]처럼 비주얼과 스토리 라인이 화려한 소설도 좋았지만 의외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 같은 정통 소설까지 잘 읽혔다. 물론 [거짓말이다]를 쓴 소설가 김탁환이 세월호 유족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단편소설들에 담아낸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나 젊은 작가 박상영의 놀라운 데뷔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와 후속작 [대도시의 사랑법] 같은 단편집을 읽은 것도 전자책을 통해서였다. 택배 노동자의 일상을 다룬 이종철의 만화 [까대기]도 전자책으로 사서 읽었는데 그 이후 서천에 있는 국립행양생물자원관에 황선도 관장님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거기서 이종철 만화가와 합석해 같이 저녁을 먹으며 '책 잘 읽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어디선가 내가 쓴 짧은 독후감을 읽은 기억이 난다고 해서 혼자 뿌듯해하기도 했다.  


작년 겨울 혼자서 제주도에 한 달 가 있을 때도 전자책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갑자기 출판사 '난다'에 꽂힌 날 김민정 시인이 예전에 냈던 에세이 [각설하고,]와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다운받아 읽었고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도 생각난 자리에서 바로 내려받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 전엔 무슨 원고를 쓰다 막히자 강원국의 [나는 말하듯이 쓴다]를 사서 괜히 뒤적이기도 했다. 사실 전에도 뭔가 쓰다가 막연해지면 바버라 에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이나 은유의 [쓰기의 말들] 같은 책들을 몰래 사서 조금씩 읽었다. 글쓰기에 대한 뻔한 아포리즘들이 들어있을 거라는 오해를 받기 딱 좋은 책들이지만 그래도 막상 읽으면서 많은 도움과 위로를 받았다.

어젯밤 아내와 함께 넷플릭스로 본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에서 빌 게이츠가 일 년에 한 번씩 '생각 주간'을 정해 책을 싸들고 오두막으로 들어가 일주일 동안 혼자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커다란 가방에 책을 잔뜩 싸가지고 산속으로 가는 빌 게이츠를 보면서 "저건 빌 게이츠니까 할 수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꼭 그렇진 않다. 이젠 누구나 가벼운 전자책에 수십수백 권의 책을 넣어 어디든 가져갈 수 있으니까. 혼자만의 장소와 시간만 확보할 수 있다면 당신도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다.


흔히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런데 책을 잘 안 읽는다 뿐이지 글은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인터넷과 모바일 덕분이다. 특히 생각나는 대로 마구 올린 SNS의 조각글들이나 인터넷 댓글은 읽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로감을 선사한다. 전자책은 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글을 읽는 피곤함으로부터 나를 구출해준다. 잘 정리된 글을 읽고 싶을 때마다 램프를 문질러 지니를 불러내듯 옆에 있는 전자책을 켜보자.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이 바로 지금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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