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처가의 캘리
집들이 선물로 주신 라미펜이나
목걸이 지갑도 고맙지만
저희를 응원해주는 그 마음
고마워서 할 수 없이
잘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순희 선생님
황선도 관장님
이사 온 뒤 계속 이어지는 손님맞이에 좀 지치기도 했고 생각보다 비용도 제법 많이 들어서 요즘은 집들이를 자제하고 있었는데 어제는 모처럼 아내와 마트에 가서 닭을 사고 야채도 고르며 파티음식 준비를 했다. 토요일 저녁에 황선도·강순희 커플과 박규옥·이승모 커플이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황선도 박사님은 서천에 있는 국립행양생물자원관에서 코로나 19 때문에 지난 몇 달간 관사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다가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오셨고 강순희 선생은 우리 집 공사 중간에 찾아와 격려를 해준 것은 물론 구포국수에 가서 낮술까지 사주고 가신 분이라 꼭 한 번은 모시고 싶었다. 아내는 두 분과도 친하게 지내는 박규옥 선생과 이승모 선생도 한꺼번에 모시기로 했단다. 생각해 보니 이 멤버 구성으로 광장시장에서 만나 놀았던 게 일 년도 넘는 것 같았다.
약속시간인 6시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황선도 박사님과 강순희 선생이 한옥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공사하느라 힘들었겠다고, 고생했다고 노고를 치하하며 축하를 해주셨다. 황선도 박사님은 내 선물로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에서 만든 기념품 라미펜을 가져오셨다. 내 글씨를 좋아해서 이 선물을 골랐다고 하는 소리를 듣던 강순희 선생이 그 펜으로 캘리그라피를 하나 써서 자신에게 선물로 달라고 하자 "어허, 당신은 왜 선물 받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그래...?"라며 나무랐다. 이분들은 늘 이런 식이다. 서로 말만 하면 싸우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정말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내는 친한 친구처럼 늘 투닥거리는 두 분이 너무 재밌고 정겹다고 했다. 곧이어 박·이 커플이 베트남 보드카와 연태고량주를 들고 도착했다. 우리는 식전에 스파클링 와인을 한 잔씩 미시며 삼계밥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새로 산 10인용 압력밥솥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밥이 좀 타서 아내는 울상이 되었다. 그래도 가지냉국과 오이지 반응이 좋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삼계밥은 너무 맛이 좋았고 박규옥 선생이 가져온 마라샹궈는 밥과 술 사이를 잇는 훌륭한 술안주가 되어 주었다.
연태고량주를 마시다가 고량주에 '오래된 처녀'라는 뜻이 숨어 있다는 소문 얘기가 나와 아닌 밤중에 네이버로 중국어 검색을 하느라 난리가 났다. 중국에서 아이들을 건사하며 대학원을 다녔던 박규옥 선생은 유학은 자신이 했는데 정작 중국어에 대한 지식은 남편인 이승모 선생이 더 많다고 하며 화를 냈다. 이 커플도 대화만 시작하면 싸우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언어와 억양을 구사한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들이다. 결국 오래된 처녀 얘기는 낭설임이 밝혀졌고 고량주는 '마을마다 빚던 고유의 술'이라는 뜻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나는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박규옥 선생이 간간이 쓰는 글의 열혈팬이기에 거기에 등장하는 '고이즈미를 닮은 손님'은 안녕하시냐고 물었더니 박 선생은 고이즈미도 잘 있고 고이즈미를 사모하는 아주머니도 여전히 안녕하시다고 하면서 그들의 뒷얘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24시간 편의점에 비치는 인간군상의 이야기들은 너무너무 웃기고 슬펐다. 아무튼 박 선생이 쓰는 편의점 이야기는 일본 작가 무라타 사카야가 쓴 소설 [편의점 인간]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11시쯤 술이 모두 바닥이 나자 이승모 선생이 자기가 2차를 살 테니 여기를 치우지 말고 그냥 다 나가서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아내만 빼놓고 모두 밖으로 나갔다. 구포국수나 새천년호프는 모두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덴뿌라는 팔지 않는 술집' 덴뿌라를 추천했다. 덴뿌라는 새벽 두 시까지 영업을 하니까. 가게에 들어가 오징어볶음을 비롯한 주문 가능한 안주들을 시키고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동네 술꾼들처럼 떠들며 놀았다. 집에 혼자 남아 빛의 속도로 설거지를 마친 아내도 뒤늦게 합류해 가열차게 소주를 마셨다. 다들 취해서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괜히 술이 한 잔 더 하고 싶어져 편의점에 가서 만 원에 네 캔 하는 맥주를 사다가 혼자 마시다가 배가 불러 씽크대에 쏟아버리고는 쓰러져 잤다. 늦잠을 잘 계획이었지만 일요일 아침에 마당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너무 커서 또 일찍 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