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
그날 나는 서둘러 퇴근을 하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광선]이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극장은 종로 2가 허리우드극장에 세 들어 있던 서울아트시네마였는데 강남에서 가기엔 시간이 좀 빠듯해서 전철에서 내려 거의 뛰어야 했다. 이곳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가면 옥상 위에 극장에 있는 독특한 구조였고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느리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내가 헐레벌떡 엘리베이터를 터고 닫힘 버튼을 눌렀는데 누가 밖에서 버튼을 눌렀는지 다시 문이 열렸다. 양복을 입고 머리가 짧은 남자 둘이 탔다. 인상이 썩 좋지 않은 사내들이었다. 나는 무표정하게 엘리베이터의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한 남자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야, 담배 하나 줘 봐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담배를 달라고 하다니. 혹시 나에게 하는 말인가? 그때 옆에 있던 남자가 담배와 라이터를 남자에게 권하며 대답했다.
"예, 형님."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담배를, 그것도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뭔가 비실존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던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형님, 어제 아킬레스건 짤라버린 새끼 있지 않습니까. 피가 아주 많이 났는데. 아, 그거 진짜 나쁜 새낀데, 죽여버렸어야 하는데요, 형님......"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않고도 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신기하고 대견했다. 구식 엘리베이터는 아주 느렸고 좁은 엘리베이터 안엔 두 남자와 담배연기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벽이나 가구 같은 무생물이 된 느낌이었다. 벽이나 가구로 변한 존재에게서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성인 남자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면 피가 얼마나 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린 남자와 그 부하는 낄낄거리면서 볼링장 옆에 있는 123 캬바레로 들어갔고 나는 옥상 바닥을 걸어 서울아트시네마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속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123 캬바레로 뛰어들어가 "야, 아까 너희들 아킬레스건 얘기 다 거짓말이지, 이 새끼들아?" 하고 따져 물을 용기는 없었다.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은 여름휴가를 혼자 떠났던 여자가 해변에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었다.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바람둥이 여자가 웃통을 완전히 벗고 여자에게 "돌아다녀보자고요. 남자도 꼬시고."라고 얘기하던 장면이 기억에 남았고 마지막 해변가에서 주인공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녹색광선을 맞이했을 땐 기쁨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좋은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1986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4층 옥상으로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계단으로 일 층까지 내려갔다. 이 극장은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려서 내려갈 땐 계단을 이용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