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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04. 2020

교보문고는 군웅이 할거하는 무림이었다

교보문고 'New&Hot'에 선정된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내 책이 교보문고 오프라인의 'New&Hot' 부문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우리 부부의 친구인 손영연 대표가 보내왔다. 광화문 교보에 우연히 들렀다가 매대에 놓인 책들 사진을 카톡 메시지로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본 순간 심하게 가슴이 요동쳤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장 광화문으로 달려가서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어제는 급하게 들어온 슬로건 아르바이트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원래는 금요일까지 보내주기로 했었지만 실무자들이 보고하기 전에 미리 '검토'를 해야 한다고 해서 목요일이 데드라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동영상 광고 자문 요청까지 들어왔다. 며칠 전 전화 통화로 의견을 나누었던 프로젝트였는데 알고 보니 내가 다른 광고 실문자들에게 자문을 얻은 뒤 페이퍼를 작성해 보내줘야 하는 건이었다. 클라이언트와 나, 서로의 미스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나는 급하게 윤종원 감독과 카피라이터 서덕 씨에게 전화를 걸어 '미완성 상태'인 동영상 광고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PPM 준비로 한창 바쁘다는 윤 감독은 기꺼이 시간을 내서 의견을 내주었고 덕분에 서덕 씨와도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앉아 두 가지 건을 모두 해결하고 나나 오후 5시였다.


"여보, 나 교보문고 좀 다녀올게."

하루 종일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빨빨거리며 일을 하던 나를 바라본 아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현장에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매대의 책들은 잘 있겠지만 그래도 굳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하는 나의 유치함을 헤아려 주었기 때문이리라. 성북동 큰길에 있는 여운형활동터 정류장에서 160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QR코드까지는 필요 없고 체온만 재면 무사통과였다. 나는 짐짓 경제경영서와 역사 코너를 천천히 쳐다보는 척하다가 바로 에세이 매대로 갔다. 있었다. 'New&Hot'이라는 표지가 붙은 곳에 나의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가 놓여 있었다. 내 옆에는 영광스럽게도 정호승 시인의 새 책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달의 책' 코너에도 내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 책을 그대로 지나쳐 다른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사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기만 했다. 내 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쳐다보기만 할 뿐 사가지 않았다. 모두 여기 와서 책을 살 생각은 없고 오로지 간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사람들이 왜 이래, 도대체?


문득 고개를 들어 매장 전체를 보니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밀려왔다. 교보문고는 군웅들이 할거하는 중원 그 자체였다. 소설 쪽에서는 절대 강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십만 대군을 이끌며 포효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무서운 신예 정세랑이 불을 뿜었다. 에세이 코너에서는 무림 고수 이석원과 장기하가 화산논검 중이었다. 그 정파들 사이에서 내 책은 부들부들 떨며 옹색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표지 컬러 때문인지 얼굴빛도 노랗게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막강 무공을 뽐내는 영웅들 사이에서 나는 마치 [사조영웅전] 초기에 등장하는 곽정처럼 어리숙하게만 보였다. 아, 이래서야 어디 명함이나 내밀겠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이 원래 내 모습이었다. 어차피 나는 인생 내내 큰소리치며 잘난 체를 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어쩌다가  'New&Hot' 부문에 선정이 되긴 했지만 이건 일시적인 행운일 뿐이다. 다만 내가 쓴 책의 내용이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다. 더구나 제목부터 '놀고 있다' 아닌가. 놀고 있다는 놈이 너무 힘이 센 건 이미지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어쨌는 출간 한 달여 만에 4쇄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베스트셀러 코너를 쳐다보았다. 에세이 베스트 코너엔 이름도 알 수 없는(심지어 문장으로 된 저자 이름도 있었다) 사람들의 책이 위풍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그래, 저 자리에 내가 오를 리가 있겠어. 베스트보다는 스테디가 좋지. 나는 스테디셀러가 될 거야. 틈만 나면 고개를 쳐드는 겸손과 적당주의를 애써 품속으로 욱여넣으며 황급하게 서점 밖으로 나왔다. 겨울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고3 학생과 재수생들이 저마다 마스크를 쓰고 수능시험을 치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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