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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19. 2020

제대로 읽은 자와 아닌 자의 차이

차무진의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성법]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어떤 책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황당한 건 나도 그걸 분명히 읽었는데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마음을 다해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무진의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를 펼쳐 들고 맨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나도 분명히 책 앞머리에 나오는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을 읽었지만 차무진 작가가 거론하는 팩트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니발 렉터의 식인 습성은 어린 시절 리투아니아에서 여동생 미샤의 고기를 먹은 비극적인 사건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하니발 렉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격인 [레드 드래곤]의 윌 그레이엄에게 렉터는 동질적 유대감을 느끼는 존재이고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 스탈링에게는 아버지이자 동료이며 극복해야 하는 대적자라고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한니발>에서는 렉터가 의식을 잃었던 스탈링을 치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고 한다. 내가 왜 '~라고 한다'라고 쓰냐면 정말로 이런 것들이 대부분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당장이라도 [양들의 침묵]을 사서 다시 읽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참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충동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독자라고 모두 작가가 될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가 될 사람은 훌륭한 독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차무진은 김연아를 시작으로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들, 배트맨, 스타워즈, 곡성, 인수대비, 칠드런 오브 맨, 에덴의 동쪽, 오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도세자, 프로메테우스, 사냥꾼의 밤... 등등 동서고금의 소설과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을 거론하며 뼈아프게 알려준다. 이 책은 주인공이 빛나려면 그에 대적하는 빌런의 캐릭터와 포지셔닝이 더 확고해야 한다는 '작법론'을 설파하고 있지만 그런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거론하는 작품들의 분석만으로도 그 의의가 만만치 않다.  나도 분명히 읽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지만 거기에 그런 명대사들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나도 비디오로 보았던 [엔젤 하트]지만 미키 루크가 당구장 안에서 싸우던  씬과 환풍기 그림자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킬링 이브]를 봤지만...... 반성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내겐 차무진이 빌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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