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쏟아지던 밤에

박서영의 유고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가 낭독되던 날

by 편성준

어려서 해양 사고 같은 게 나면 뉴스에서 '사망 몇 명, 실종 몇 명'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듣고 '사망한 사람은 안 됐지만 실종된 사람들은 나중에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실종이라는 말이 사체를 찾지 못한 경우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릴 수 없어서 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처럼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시인이 또 있었다는 사실을 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박서영의 유고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에 수록되어 있는 '성게'라는 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실종은 왜 죽음으로 처리되지 않나
영원히 기다리게 하나
연락두절은 왜 우리를
노을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항구에 앉아 있게 하나
달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앉아 있게 하나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이 뚜렷한 글씨를 쓸 때까지
물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하나
기다리는 사람은 왜 반성하는 자세로
사타구니에 두 손을 구겨 넣고는 고갤 숙이고 있나


2019년 3월 30일 토요일인 어제저녁 혜화동 로터리 동양서림 안에 있는 시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서 김민정 시인과 박세미 시인이 낭독해주는 박서영 시인의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에 실린 시들을 읽고 들으러 갔다. 일곱 시쯤 가보니 서점 안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입장권이 마감된 뒤에 신청을 했는데 김민정 시인이 특별히 허락해준 케이스라서 회비를 내지 않는 대신 이따가 보조석에 앉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빵집에 가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곱 시 반에 다시 와 뒤쪽 스툴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위트 앤 시니컬의 운영자인 유희경 시인이 나와서 뭐라 뭐라 낭독 비슷한 걸 시도했는데 아마도 마이크 테스트였던 것 같다. 이어 소녀 같은 인상의 박세미 시인이 나와서 '입김'이라는 작품부터 박서영의 시를 차례차례 읽기 시작했다.

2018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박서영 시인은 말주변이 굉장히 풍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산조각 나 버린 심장. 달은 그 파편의 일부다.' 같은 표현이나 '더 깊이 만지기 위해 살을 파고들고 들어가 서로의 뼈를 만지면서부터 대부분은 불행해졌다'라는 통찰을 읽어보면 이 시인의 언어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느낌은 박세미 시인의 분명하고 차분한 낭독으로 인해 더욱 크고 분명해졌다. 1부가 끝나고 음악이 흐르는 동안 김민정 시인이 우리에게 잠깐 아는 체를 해주러 왔다. 쟤(박세미 시인)가 너무 낭독을 잘해서 뒤에 하는 자기는 걱정이라고 엄살을 떨던 '민쟁' 시인은 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입고 있는 강렬한 꽃분홍색 원피스만큼이나 절절하고 서늘한 억양으로 '미행'을 비롯한 박서영의 시들을 낭독했다.

두 시인의 낭독이 모두 끝난 후엔 유희경 시인의 사회로 시집에 대한 자유토론이 있었다. 김민정 시인이 처음 박서영의 시들을 접한 것은 '투고' 형태로였는데 50편 가까운 시 뭉치들이 '홀수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원고들을 검토할 땐 이미 시인이 혈액암으로 사망한 상태라 편집자로서 작가에게 궁금한 점들을 물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책을 내기 전 세 번 정도 하는 원고 검토를 무려 열 번이나 하는 등 고심을 해서 '작가의 말'도 만들고 시집 제목도 '홀수의 방'이라는 시의 맨 끝에 있는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고 대목으로 정했다고 한다. 얘기를 하다 보니 김민정 시인뿐 아니라 박세미 시인이나 유희경 시인 모두 박서영 시인을 살아생전 만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객석에 와 계시던 어떤 시인께서(성함을 제대로 못 들었다) 박서영 시인에 대해 '조용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라는 다소 짧고 허무한 인물평을 해주셨다.

박세미 시인은 박서영의 시인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지병을 알리지 않고 투병하다가 갑작스럽게 작고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다면 시집 안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투영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작품들을 읽어보니 투병보다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들이 많아서 놀랐다고 했다. 김민정 시인은 박 시인이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건 내가 어디까지 밀고 갈 수 있는지 한 번 해보자'라고 한 느낌이 드는 시들이 많았다면서 읽으면서 밑줄도 많이 쳤고 그중 제목으로 할 만한 것을 찾느라 고민도 참 많이 했다고 했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시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딱 느껴지는 대표적인 구절을 찾다가 결국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는 표현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만약 시인이 살아 있었으면 목련이나 버스정류장 얘기가 너무 자주 나온다며 빼게 했을 거라고 하자 유희경 시인도 "맞아요, 목련이 너무 자주 나와"라며 웃었다. 그러나 눈 밝은 독자들은 이 시들을 읽고 나서 '좋은 시집 읽게 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를 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이 시집을 기획한 김민정 시인은 '개인적으로 3쇄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말도 했다. 초판 '시인의 말'에서 2017년 10월 18일을 '2018년 10월 18월'이라고 쓰는 오자 사고를 냈다는 것이었다. 김 시인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중에 '10월18월'이라는 제목의 시도 한 번 써 볼 생각이라고 해서 큰 웃음을 주었다. 행사가 끝나고 위층에 있는 시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에 올라가서 시집들을 구경했다. 아내가 오은의 새 시집을 집어 들고 '오은 시인이...' 라고 얘기를 시작하자 마침 카운터에 서 있던 오은 시인이 깜짝 놀라서 "제가 오은인데요?"라고 하길래 어제 우리 부부가 재방송으로 '방구석1열'에 나왔던 시인님을 보았다는 얘기를 한 거라고 설명을 해야 했다. 나는 유희경 시인에게 김종삼 앤솔로지를 들고 가 김종삼 시인의 다른 책은 구할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옆에 '김종삼 정집'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시인이 가리키는 곳을 다시 가보니 과연 내가 책을 뽑았던 자리 바로 옆에 10,000페이지가 넘는 김종삼 정집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나는 책이 너무 커서 오히려 보지 못했다고 하며 그 책을 달라고 했다. 가격이 5만 원이나 되었지만 김종삼의 모든 시가 다 들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결코 비싼 책이 아니었다. 나는 박남철 시인의 다른 시집을 구할 수 없느냐고도 물었는데 유 시인은 <바다 속의 흰머리뫼> 말고는 현재 다른 시집은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얘기해 주었다. 카드 결제를 하며 오늘 낭독회는 어떠셨냐고 묻길래 "보통 시집을 한 권 사면 그 안에 들어있는 언어들이 너무 촘촘해서 한꺼번에 두 세 편 이상을 읽지 못하는데 오늘은 시인들이 강제로 낭독해서 주입을 시켜주는 바람에 한꺼번에 많이 읽을 수 있었어요."라고 대답했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낄낄낄 웃었다. 아내는 <겨울을 견뎌낸 나무>라는 그림책을 한 권 구입했는데 오늘 저녁에 '내용이 참 좋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귀와 눈과 가슴 속으로 시가 마구 쏟아지던 밤이었다. 시인들이 읽어주는 시는 일반인이 읽는 시와는 맛이 달랐다. 아마도 낭독하는 시어 한 자 한 자마다 동업자 특유의 사랑과 관심이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민정 시인과는 예전 '장석주 박연준 시인 행사' 이후 오랜만에 만나서 더욱 반가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괜히 친한 척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서점에서 나왔다. 도저히 그냥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성북동 '덴뿌라'에 가서 과메기에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동네 후배 김혜나가 와서 한 병을 더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집에 와서 취한 상태로 유투브 라이브를 켜고 '소행성 책방 -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는 추태를 부렸다.



박서영의 시를 낭독하는 김민정 시인과 박세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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