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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21. 2021

몰스킨

수첩과 메모에 대한 상념

책과 고양이들이 있는 책보냥이라는 동네 카페에서 양익준 감독의 1인 마켓이 열린다고 해서 아내와 갔었다(카페는 우리 집에서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그의 집에 있던 손때 묻은 물건들을 가져와 저렴하게 파는,  그냥 재밌자고 하는 마켓이다. 양익준 감독은 이 동네 주민이고 카페 주인 김대영 작가와는 막역한 선후배 사이라 이런 일이 가능했다. 팬들이 와서 한 차례 쓸고 간 뒤라 건질 만한 물건들이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내는 마음에 드는 것들을 찾아냈고 그때마다 김대영 작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점찍었던 물건들만 아내가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흔쾌하게 물건들을 양보해 주었다. 물건들은 말도 안 되게 쌌다. 이 몰스킨은 비슷한 수첩 두 권 중 하나였는데 역시 김대영 작가가 눈독을 들인 것이라 해서 한 권을 양보하고 얻은 것이다. 나는 이 수첩을 갖고 김대영 작가는 양익준 감독이 예전에 여자 친구에 거 선물 받았던 수첩을 챙기기로 했다.

추석 새벽인데 비가 온다. 잠에서 깬 나는 마루로 나와 영화  『똥파리』의 팸플릿과 책보냥에서 산 최민식 작가의 사진집을 본다. 소설가 하성란과 함께 만든 책인데 사진과 글이 모두 너무 좋다. 제목은 『소망, 그 아름다운 힘』이다. 이렇게 좋은 수첩에는 뭔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글이 척척 때 맞춰 나올 리가 없다. 그래도 빗소리를 들으며 뭔가 쓰는 게 좋아서 꾸역꾸역 쓴다. 수첩은 좋은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할 걸 적어 놓을 수도 있고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상념이나 아이디어를 고정해 놓을 수도 있으니까.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아무렇게나 휘갈긴 메모들에서 출발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득해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미국에 사는 규환이 형이 카톡으로 추석 인사를 전해왔다. 한국에 잠깐 와서 우리 집에 들렀을 때를 그리워하며 아내의 안부를 묻고 '언제나 그렇듯이 저 우연의 시간이 필연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오기를 기대한다'라는 말을 남기셨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 빗소리를 들으며 뭔가 글을 쓰고 있다고 했더니 형은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는 것. 야...그것도 한옥의 거실에서."라며 부러워했다. 제가 누리는 작은 행복이죠,라고 쓰니 형은 결코 작지 않다, 라는 격려의 말을 해주며 안녕을 고했다.

내 책상 위로 올라와 노트북 옆에서 자다가 나에 의해 창문 앞 의자 위로 쫓겨난 고양이 순자는 가벼운 항의의 표시로 비가 오는 창밖을 몇 분째 노려보고 있다. 오늘은 왠지 날짜를 써 놓고 싶어진다.


2021. 9. 21 am 6:19

성북동 소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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