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처럼 살았습니다

볼펜으로 쓴 시

by 편성준

만년필처럼 고귀하거나

까다롭진 않았지만

늘 고른 필기감을 유지하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잉크를 다 쓰기도 전에

나를 잃어버리는 이들이 야속했고

서랍에 잔뜩 있는데도

새로운 볼펜을 사는 걸 보면

내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죠.


빌려간 사람이 돌려주지 않아도

용인되는 무신경이 싫었습니다.

호텔방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존재란

얼마나 하찮은 것이냐는 비아냥과

옆구리에 글자를 새기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싸우는 인생이었습니다.


어느날 샤프펜슬이 흑심을 품고

제게 다가오더군요.

순간 경계했지만 그의 눈빛엔

가느다란 슬픔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도 넌 한 번 쓰면 안 지워지잖아.

나는 늘 지우개에게 항복하고 만다.

천적이 없는 너는 행복한 아이야.

그리고 내 마음은 잘 부러져.

네 심처럼 신축성이 없거든.

뾰족해 보이지만 사실 너는

둥근 볼을 품고 산다는 걸 잊지 마.


샤프펜슬의 우정 어린 설복에

볼펜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의 손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연필이나 만년필로

갈아탈 생각은 버렸습니다.

나는 볼펜이니까요.


볼펜으로 살아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작가에게

영감이 달아나지 않게 해 주고

재래시장 사장님의 회색 수첩에

밥이 될 숫자들을 남기고

QR체크인이 불편한 이들에겐

출입 명부를 대신 써준 것처럼

나는 볼펜의 길을 걷겠습니다.


둥글지만 무르지도 않게

수십억 개의 볼펜들과 연대하면서

세상에 하찮은 흔적 남겨봐야죠.

만장하신 만년필, 연필 여러분,

저는 볼펜으로 살아왔습니다.

계속 볼펜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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