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컸던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아버지의 회사가 망해 집에서 가족이 다 같이 쫓겨났다.
오빠는 급하게 군대를 보내버리고 남은 가족은 월세집을 구해 들어갔다.
아빠가 아끼던 외제차, 엄마의 가방, 패물 등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팔았다.
나는 엄마를 대신해 압구정에 있는 중고명품매장에 가서 엄마의 가방을 팔고 중고나라에 가입해 단돈 1-2만 원짜리 물건도 뭐든지 팔았다.
강남의 좋은 집 좋은 학군에서 자란 나는 그 당시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대학교도 합격했는데 부모님은 나의 학비를 마련하려 여기저기 돈을 빌려댔다.
동네에서 함께 커온 친구들은 대학에 간다고 명품백, 작은 소형차등등을 선물 받았다.
배부른 소리지만 나는 자존심이 상해 미처 팔리지 못한 엄마의 명품백을 메고 친구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만나러 가곤 했다.
뒤에선 돈 아끼느라 가까운 역은 늘 걸어 다녔다. 다이어트를 핑계로 참 많이 걸었었다.
처음에는 숨길 수 있었다. 대학생이니까 값싼 음식을 먹어도 좋았고 노느라 용돈이 부족하다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친구들이 호텔 라운지바에 가자거나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면 토익공부를 해야 한다는 둥 갖은 핑계로 거절하기 바빴다.
누구에게는 진짜 가난이 아니겠지만 늘 풍족하게 자라온 나에게는 어쩐지 숨기고 싶은 치부 같았다.
다행인지 뭔지 20대 초반에 빈티지가 대유행이었다. 친구들과 부산에 놀러 가 빈티지 값싼 1-2만 원짜리 외투를 사서 주구장창 입고다녔다.
20대 중반이 되고 회사를 들어가서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
첫 월급은 수습기간으로 15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바로 뛰쳐나가 현금 100만 원을 뽑아서 봉투에 담았다.
나도 모르게 괜히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엄마에게 생활비로 주었더니 무척이나 기뻐했던 것이 기억난다.
외근도 많고 교육이 많던 직무라 1-2만 원짜리 옷을 입은 내가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 당시 역 근처에는 작은 옷가게들이 있었는데 코트나 패딩을 10만 원 정도로 구매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이나 지하상가에서 산 옷들보다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회사에도 입고 갈 외투가 생긴 것 같아 롱 패딩과 코트를 사서 롱패딩은 엄마를 하나 주고 나는 긴 코트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3여 년 전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김고은의 대사를 무척이나 공감했었다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나요”
그 대사가 참 아팠다. 월급 대부분을 월세와 보증금 대출 이자에 쓰고 엄마 병원비에 보태던 때라 아우터 두 개에 10만 원은 내겐 사치였다.
그때는 가난을 잘 숨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보풀이 잔뜩 일어난 부직포 같은 코트를 사 입고는 싸구려 옷 티가 안 나겠지? 믿었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져 부모님께 도움도 받고 내 힘으로 수십만 원짜리 옷을 잘도 사지만 그 당시 겨울이 종종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중반에 값싼 옷을 입으면 어때 괜찮으니까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당시에는 그저 주변 친구들을 부러워하느라 젊음을 잘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