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나의 취향 (2024-봄)
#1 제 이상형은요,
얼마 전 친구와 함께 이상형을 적어보는 새삼스러운 시간을 가졌다. 유튜브에서 본 한 영상 때문이었다. 이상형에 대해 써보면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고, 꽤 재미있어 보였다. 몇 년째 입으로만 정리하던 이상형 조건이 있는데, 그걸 적으면 무언가 달라질까 하면서도 종이와 펜을 꺼냈다. 한 번씩 돌아가며 이상적이고도 현실적인 조건을 짚어 나가던 중, 친구는 내가 적은 하나의 조건을 보고는 신기해했다. ‘본인의 향수를 2~3개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 흘려 물은 질문에 가볍게 답한 것이 아닌, 제법 진지하게 떠올린 조건이었다.
#2 향을 더하기 위해서는
“그러면 씻지 않고 향수만 뿌리는 사람도 좋아?” 장난스러운 질문이 따라왔다. 음, 그럴 리 없지 않겠냐 답하는 동시에, 최근 찾아본 향수의 역사를 떠올렸다. 17세기 프랑스, 향기의 제왕이라 불리는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해 향료와 향수 산업은 크게 발전했다. 이 시기 향수는 가죽 특유의 지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쓰였다고 한다. 향수의 기원은 그럴지라도, 내가 생각하는 향수의 목적은 다르다. 나에게 있어 향기는 빼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쾌한 냄새를 덮기 위한 향은 매력적일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깨끗하게 관리된 무(無)의 상태에 마지막으로 더하는 것, 그것이 향의 핵심이다. ‘향수 2~3개를 가지고 있는’이라는 말을 구태여 붙여본 것도 그 이유에서다.
#3 한 끗 차이
어떤 사람의 특성을 '향'이라는 단어를 빌려 말하곤 한다. 그렇다면 향이 좋은 사람은, '취향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니치 향수가 인기를 끄는 이유 또한 일반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독특한 인상을 풍길 수 있기 때문. 취향 좋은 사람을 마다할 사람이, 또 그럴듯한 취향을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취향을 찾기 위해 힘썼던 작년, 유독 향수를 많이 구매한 기억이 있다. 마음에 드는 향을 찾기 위해서는 시향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내 마음에 쏙 드는 향을 찾아 친구에게 시향을 권해보았는데, 훅 맡더니 그저 그런 표정을 지었다. 찾기 어렵다고 하는 게 취향이지만, 향만큼은 아이덴티티가 있나 하고 오히려 위안이 됐다. 마음에 드는 향수를 여럿 찾고, 좋은 향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을 즈음 내 취향도 명확해졌다.
#4 취향에 감도를 더하는 법
사실 향수만 많이 구매했던 건 아니다. 그간 옷, 신발, 목걸이 등 마음이 가는 아이템을 많이도 모았다. 즐겨 찾는 플랫폼은 단연 29CM인데, VIP라는 뿌듯하고도 찝찝한 타이틀을 유지한 지 오래다. ‘감도 깊은 취향 셀렉트샵’이라는 소개말부터 취향을 강조하는 29CM는 패션, 홈, 뷰티, 테크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 취향을 녹인다. ‘취향도 가지가지’라는 브랜드 캠페인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취향이란 가장 나다운 방향을 찾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가장 자기 다운 취향을 찾는 여정에 함께하겠다고 다독인다. 깔끔하고 단정한 아웃핏을 추구하는 내가 소품만큼은 키치한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느낀 건 ‘퍼피북클럽’의 패브릭 다이어리를 마련하면서다. 요즘은 29CM를 이용하는 친구들의 장바구니를 털어보는 걸 즐긴다. 옷부터 전시회 티켓까지. 이토록 다양한 아이템을 어떤 마음에서 담았을까? 하며 그들의 취향을 들여다보는 게 흥미로워서다. 그러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아이템을 발견하면 나도 담아보겠다 선언하고, 합법적으로 훔쳐먹는 과정도 쏠쏠한 재미!
#5 어느 카페의 핸드워시를 보면
그렇게 마련한 취향 아이템을 장착하고 카페로 향한다. 나에게는 좋아하는 카페를 고르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바로 화장실에 비치된 핸드워시를 보는 것이다. 이솝과 같이 유명하고 비싼 것일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적당히 향이 좋은 핸드워시라면 좋겠다. 카페에 가면 기본적으로 1~2시간 정도 머물고 손도 두어 번 씻으니, 대충 물 타지 않은 깔끔한 핸드워시를 만나면 ‘이 카페 사장님 감각 좋네’ 생각한다. 카페에 오래 머무르다 밖으로 나오면 온몸에 커피 향이 나는 것처럼, 머무는 공간에 좋은 향이 나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도 그 사람의 개인적인 공간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공간은 그 자체로 정체성을 담는 동시에 이상형을 마주할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나아가 패션, 뷰티 등 외적 영역보다도, 은밀한 내적 영역인 ‘공간’에 나를 투영하는 과정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6 제 방을 소개합니다
워낙 바깥 활동을 즐기는 탓에 일주일 중 온종일 집에만 머무르는 날이 하루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불현듯 에너지 비축의 필요를 느꼈던 날, 좋은 향이 풍기면 집에 붙어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랑핸드의 캔들을 두어 개 구매했다. 좋은 향이 나는 방은 왠지 지저분하면 안 될 것 같아 방 청소도 조금 했다. 빌트인 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자취방의 분위기를 인테리어로 바꾸는 건 한계가 있지만, 깨끗한 방에 새로운 향을 더하면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실제로 홈 프래그런스 시장은 연평균 4% 성장률을 보인다고 하니, 리빙 카테고리에서 '향'은 은근하고도 확실한 존재감을 뽐내는 듯하다.
#7 느낌 좋은 선물
얼마 전 처음 자취를 시작한 친오빠를 위해 ‘오늘의 집’에서 캔들을 구매해 선물했다. 집을 꾸미는 데 영 관심도, 감각도 없는 오빠가 향기로웠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향기 아이템을 선물하는 건 호불호가 있는 위험한 시도일 수 있겠지만, 룸 스프레이나 아로마 오일 등을 선물하는 건 센스 있게 느껴진다. 오히려 마음이 가는 상대에게는 시각적으로 매력이 느껴지는 일반적인 아이템보다, 향기 아이템을 선물하고 싶다. '프루스트 현상'을 믿기 때문인데, 이는 과거에 맡았던 냄새에 자극받아 특정한 것을 떠올리는 일을 뜻한다. 그러니 향기 아이템을 선물한다는 건 상대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다는 은근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다양한 감각으로 나를 기억해 달라는 일종의 외침이다. 향수 선물의 의미도 ‘나를 언제나 기억해 줘’라고 하니, 이상형을 만나면 뜬금없이 향기 아이템을 선물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잠시 생각했다.
#8 이상형과 이상향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은 5개로 정의되는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시각을 좇으며 살아가는 듯하다. 이상형의 조건을 이야기로 풀어낼 때도, 습관적으로 키나 생김새 등과 같은 시각적 요소를 말한다. 내가 이상형으로 ‘향수를 2~3개 가진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은 건, 상대가 후각까지 신경 쓰는 깔끔함과 섬세한 취향을 지녔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2페이지 내내 ‘이상형’과 ‘이상향’, 모음 하나 다른 이 단어를 지독히 파 보았다. 이상형을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본인의 취향을 줄줄 읊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본인에게 중요한 가치를 상대도 가지고 있길 바라기 때문일 테다. (‘나’와 ‘너’도 모음 하나 다르지 않은가?) 실제로 나는 '좋은 향이 나'라는 칭찬을 가장 좋아한다. 좋은 향수를 골라 뿌리는 것만으로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코 쉽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오늘도 몸과 마음, 말과 공간을 가다듬고 향을 골라본다.
* 대학생 광고마케팅 잡지 콤마매거진 [Issue.53 향] 자유기사 2p 수록